곽지, 협재, 신창 풍차, 차귀도, 알뜨르, 돌고래
< 5.16. 화 >
5시 45분 기상.
서둘러 제주를 빠져나가는 아들.
배낚시 하루, 구엄리 포구에서 하루, 사수항에서 또 하루.
삼 일을 고기와 친하게 보내고, 마지막 하루는 서핑으로 불태웠더니 진이 다 빠졌단다.
서울은 30도가 넘어간다며 걱정이다.
늦은 어버이날 행사로 보름 전쯤 갔었던 중문으로 장소를 잡았단다.
맛있게 배부르게 먹은 고기 때문에 백록담 등반이 수월했다는 여자들의 뜻이다.
떠나기 전날 제주도를 해안로로 빙 둘러보기로 한 일정에 무리가 있다는 아내.
시간 있을 때 조금이라도 돌아보잔다.
곽지해수욕장으로 달린다.
맑은 하늘 탓인지 바다의 색이 선명하다.
해수욕장을 벗어나 1132 도로를 달리다, 협재 해안로 표지판을 보고 다시 바다 쪽으로.
한적한 과물 해안로를 지나니 비양도로 들어갔던 한림항이 나온다.
족발 머리고기가 맛있었던 한림매일시장, 한림성당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협재해수욕장
수영으로 금방 건너갈 것 같은 비양도까지의 잔잔한 바다.
하얀에 더 가까운 옥색.
멀어지면서 파란 잉크를 뿌려놓은 것처럼 하늘에 닿은 점점 짙어지는 파랑.
바다와 하늘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
이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행복이다.
벅차올라 와! 와! 말고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가슴으로 밀려오는 환희의 파도다.
컴컴해질 때까지 노을을 보았던 신창풍차해안이다.
구불구불 차를 막아서는 돌담을 요리조리 피하며 바다 쪽으로 간다.
노련한 특급 기사가 아니면 차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더 간이 콩알만 해진다.
김대건 신부님 표착기념관과 차귀도가 눈에 들어온다.
매섬이라도 한 귀퉁이 사놓고 싶다는 둘째.
꿈이야 클수록 좋다만 나 살아서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시간은 11시에 가깝다.
점심 장소까지는 47분.
일단 해안을 벗어나자.
한라산을 바라보고 반듯하게 오르는 길.
뽑힌 마늘이 반듯하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흰 감자꽃이 쭈뼛쭈뼛 고개를 내밀었다.
은하수처럼 밭을 가득 메운 하얀 메밀꽃.
옥수수도 발돋음하고 있다.
호박은 빈자리를 찾아 손을 늘리며 노란 호박꽃으로 벌들을 불러드린다.
중산간의 밭에서는 여름맞이가 한창이다.
살치살 부챗살 연어 단새우에 집중하자.
전복을 까기가 귀찮고, 양고기는 썰기가 번거로워 한 번만.
보름 전쯤 왔을 때 입었던 청바지가 맞지 않는다는 둘째는 잔뜩 골이 났다.
몇 년을 체중과 전쟁 중이었는데, 목표를 눈앞에 두고 제주 한 달 때문에 후퇴하고 말았다나.
나는 일단 내일 새벽 등산을 위해 최선을 다할란다.
물범이면 어떻고 하마면 어떻냐?
마지막 등산은 무사히 마쳐야지.
산방산을 짙은 물안개가 덮는다.
사계 해안로(형제해안로)에 접어드니 형제섬이 가물가물, 가파도와 마라도는 볼 수도 없다.
전망이 좋았던 카페, 홍해삼이 먹었던 포장마차도 지난다.
모슬포항으로 향하는 해변을 달리다 보니 알뜨르 비행장 표지판이 있다.
인천여고 수학여행단과 섞여 비행기 격납고로 간다.
누렇게 익은 보리, 어느 격납고 위로 올라가는 들개, 멀리 송악산 아래 4.3 희생자들의 추모 공원도 있는데.
이 격납고의 비행기를 타고 조선인 가미가제 특공대가 미군 함대로 돌진했다는 사실.
한 개를 빼고 19개의 격납고가 그대로 남아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무덤처럼 보인다.
몇십 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릎을 꿇으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인자한 양반.
온 동네 사람들이 한 구덩이 묻힌 한의 자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가슴이 답답하다.
아직도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 격납고는 언제든지 다시 오겠다는 붉은 피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가파도로 들어갔던 운진항을 지나 노을 해안로에 접어든다.
가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주는 돌고래는 오늘도 여지없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유독 먼 수평선.
자전거 일주를 했을 때, 비바람을 피해 묵었던 숙소에서의 밤.
해변을 때리던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자전거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걷는 사람 중에 외국인이 많다.
외국의 어떤 도시를 저렇게 여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차귀도에서 다시 1135로 길게 오른다.
수도 없이 보았던 새별오름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오후 5시의 햇볕은 여전히 뜨겁다.
내일은 새벽 4시에 일어나자고 하는데, 체력을 남겨두자.
아직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볼펜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써본 기억이 없어 끝마무리에 갈증을 느끼는 나.
한달살이 며칠 남은 글쓰기는 꼭 잘 마치고 싶다.
힘내라 힘, 고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