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해장국, 카페, 삼양검은모래해수욕장, 정낭집
< 5. 15. 월 >
푹 잤다.
자연산 회에 취해 매운탕도 못 먹고 쓰러졌다.
엉겁결에 서핑 타기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좀 불안하다.
낮에는 좀 덥겠다는 예보가 있지만 아직은 잔잔하다.
12시부터 서핑을 타야 하니 느긋하게 일어난다.
10시를 넘기고 찬찬히 찾아가는 삼양 2동 산지 해장국(제주시 일주동로 3321).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진다.
우르릉 쾅쾅 천둥이 친다.
가로수들이 허리가 휘어지도록 바람이 불고, 엄지손톱만 한 빗방울이 쏟아진다.
둘째는 보드를 빌리는 곳으로 전화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다며 내일로 연기하면 어떻겠느냐는 대답이다.
얼굴이 찌그러지며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이다.
이렇게 순간 표정을 바꾸는 제주의 날씨는 제주 사람들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란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내며 나오는 소내장탕.
일단 양이 엄청 많다.
날 계란을 깨서 국 위에 올린다.
보드랍게 잘 삶아진 내장을 고추기름과 겨자, 마늘 다진 것, 다대기를 잘 저어 만든 소스에 찍어 먹는다.
입 안에 퍼지는 매콤하고 진득한 맛.
따뜻해지는 기운이 가슴에서 온몸으로 쫙 퍼진다.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어제 과음했으니 해장하라며 아내는 막걸리를 따른다.
아무래도 서핑은 물 건너갔고, 다른 일정을 잡아보겠다는 의도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둘째는, 땅 한 평도 러시아에 넘겨줄 수 없다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얼굴이다.
해장국 10,000원, 내장탕 11,000원으로 착한 가격, 들어올 때나 나갈 때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친절한 사장님이 제일 맘에 든다.
일단 12시까지 날씨 추위를 살피겠다는 둘째를 위해 바닷가 카페로 가자.
카페 mikuni(제주시 서흘길 41)
2층 주택을 개조했는데, 있는 듯 없는 듯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소품과 조명으로 연출한 분위가 심상치 않다.
통창으로 밀려오는 해수욕장의 풍경, 밝은 곳과 어두운 곳으로 나눈 두 공간이 분명 무슨 의도가 있을 터.
나오는 음료도 정성이 가득하다.
두어 시간 편하게 멍때리고 있어도 좋겠다.
하늘이 갠다.
빗발도 가늘어졌다.
보드를 빌리기로 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
가능하겠단다.
쫙 펴지는 둘째의 얼굴, 러시아를 다 물리친 그 대통령의 표정이 저럴까?
근처이기는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바다로 나가려면 서두르자.
SURFNJOY SURFNUP
머리가 하얀 추성훈처럼 생긴 시크한 사장님.
서핑은 해보셨느냐고 묻고는 몸무게에 따라 옷을 내준다.
보드를 놓을 장소를 알려주고는 사라진다.
특별히 나에게는 넉넉한 크기를 주겠다며 등에 자크가 없는 옷을 주었다.
싹 벗고 입으려는 나에게 핀잔을 주며, 최소한 팬티는 입으란다.
목이 들어갈 곳으로 두 다리를 넣고 옷을 잡아당기며 발이 나오게 한다.
다음은 배다.
아무리 잘 늘어진다지만 목이 들어갈 자리로 내 배가 들어가기가 어디 쉬운가.
하필이면 막걸리까지 밀어 넣었으니 더 불러 진 내 배.
배에 걸려 용을 써도 올라가지 않는다.
숨쉬기가 힘들다.
옷을 입혀주던 둘째와 아들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는다.
쓰러진다.
내 숨은 쉬게 해주어야지.
보드를 들고 늠름하게 걷는다.
아직은 한산한 덜 알려진 곳이다.
삼양검은모래해수욕장.
검다기보다 커피색에 가까운 모래다.
파도는 잔잔하다.
가는 빗방울과 두껍게 낀 안개는 물놀이에 아주 적합한 조건이다.
비록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장성댐에서 한 번에 성공했던 수상스키 경험이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두 번째라는 아들이 시범을 보이고 준비운동을 한다.
바다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 셋과 사진을 찍는 아내만.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아마 수만 명.
물이 가슴까지 차도록 바다로 나간다.
경사가 완만해 제법 멀리 나왔다.
얕은 곳에서 연습해보라는 아들의 권유도 귓등으로 들었다.
기다리면 큰 파도도 간혹 밀려온다.
첫 번째가 중요하다.
보드의 방향을 해변으로 잡고 파도가 발끝 1m 거리에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다.
가슴을 세우고 있다, 일어서며 보드 위 평평한 부분에 두 발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서서히 파도를 타며 중심을 잡으면서 몸을 일으키면 된다.
머릿속은 완벽한데, 몸을 일으키자마자 입속으로 짠물이 밀려든다.
그러기를 수백 번.
낮은 곳으로 나와 한발을 올려놓고 시도해 보아도 도저히 평행을 잡을 수 없다.
내 호언장담에 기가 죽었던 녀석들은 배꼽을 잡는다.
실력이야 서로 닮은 얼굴만큼 비슷하다.
옷 입히면서 진을 다 빼서 힘이 없다나.
너무 웃어 한 10년은 젊어졌다니, 웃겨줘서 다행이다.
배로도 사람의 배꼽을 빼놓을 수 있다.
이 바다에 나보다 더 배 나온 사람 있으면 나오라 그래.
나보다 흰머리 더 많은 사람 나오라 그래.
어깨며 허리 고관절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녀석들은 6시까지 채울 모양이다.
아내의 도움 없이는 벗을 수 없는 옷.
편의점의 캔맥주가 꿀맛이다.
웬만하면 가자고 달래보려 바다로 가보는데 아이들이 없다.
기다리는 스승의 날 선생이었던 아빠를 위해 좀 일찍 나왔단다.
지루했을 엄마를 위해 물회를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이들의 말.
시큰둥한 엄마는 네비에 주소를 친다.
제주 정낭집(제주시 지석 11길 6)
낙지볶음 4인분을 시키고 낙삼 2인분을 추가하려 했더니 다 못 먹는단다.
매꼽 달콤 부드러운 낙지볶음을 따뜻한 밥에 비벼 먹는다.
물에서 힘들었을 아이들을 위해 보양식을 먹이겠다는 엄마.
기다리느라 지루했을 엄마를 위해 좋아하는 물회를 먹이고 싶은 아이들.
서로를 위한 마음이 비벼지고 있다.
조금 멀지만, 산록도로로 길을 잡는다.
아들에게 중산간의 색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숲속.
아들은 제주도가 설화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단다.
귀신들도 섬을 빠져나가기 힘드니 우람한 나무, 기묘한 바위에 붙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도로가 계속된다.
백록담까지 넓게 펼쳐진 숲,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고라니 사슴들이 뛰고 있다.
어제 남은 매운탕에 또 막걸리다.
한달살이를 마치고, 며칠 광주에서 보내고 나면 바로 칩거할 생각이다.
그래 준비라고 해야겠다.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남은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