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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길 톺아보기

산록도로, 일출봉, 세화, 김녕, 함덕

by 고주

< 5. 18. 목 >

바다 건너 육지에는

80년 대학교 1학년 때, 눈물 콧물 쏟으며

거리를 헤맸던 5월 18일

바로 그날이다.

무겁지만 내 제주의 남은 하루를 고개 숙여 내놓는다.


9:00

산록도로를 오른다, 마지막.

복습하러 떠나는 동쪽 해안을 둘러보는 일정.

백록담에서 내려온 안개가 들뜨지 말라고 어깨를 누른다.

발아래 바다를 가리고, 눈 위 한라산 정상을 숨기는 제주도.

녹음된 USB에서 콧소리로 불러주는 노래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떠난 이별 고개

가겠다는 사람 잡아서 뭐해, 붙잡는 내 마음만 썰렁하지

눈치코치 없이 울긴 왜 울어, 여자가 눈물이 헤퍼서 쓰나...”


특수전 사령부를 지나고

백록담 등반은 날씨 관계로 전면 중단한다는 관음사도 지난다.

설문대할망의 소원을 들어주는 무거운 돌이 또 오라고 한다.


“쓰러집니다. 쓰러집니다.

올 때는 내게 예고도 없이 왔다가, 이제와서 날 떠나요.

말도 안 돼 핑계

어쩌면 잘 갖다 붙여 뻔뻔하게도

차라리 내가 싫어졌다 말을 한다면

잡을 나도 아니겠지만....”


차가 동쪽으로 빗겨나가면 바람은 더 거세지고 빗방울은 굵어진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속이 복잡한 제주도 날씨.

마방진 넓은 목장에 말들은 큰 나무 아래로 모였다.

부잡한 어떤 놈들이 착실한 동생들 놀리고 있겠지.

우비를 입고 좁은 산록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는 아낙네들.

위험해요.

제발 가정을 지키세요.

누가 그렇게 못살게 굴던가요?

조금만 참고 돌아가세요.


사려니 숲 옆을 달린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삼나무 향이 짙게 나는 숲속을 거닐었고, 안개가 장악한 물영아리오름의 몽롱한 분위기에 눌려 허우적거렸던 어느 하루.

또렷하게 살아난다.


“있을 때 잘해, 흔들리지 말고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가까이 있을 때 붙잡지 그랬어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해...”


고사리 3대 주산지 교래리를 지난다.

삼다수 공장이 오른쪽으로 1.5km만 가면 된다.

빗속 수학여행단을 태운 관광버스는 갈팡질팡한다.


“저고리 고름 말아 쥐고서 누구를 기다리나 낭랑 18세

버들잎 지는 앞 개울에서 소쩍새 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소쩍궁 소쩍궁....”


비자림을 걸었고 아부오름을 올랐던 그때도 안개와 비와 함께였다.

수학여행단은 스누피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비 오는 날, 특별히 고민했을 일정.

입장료가 장난이 아닌데.

좁은 도로 옆에 서서 호루라기를 부는 저 선생님.

소주라도 한 잔 몰래 하세요.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내가 지쳐 있을 때, 내가 울고 있을 때

위로가 되어 준 친구.

넌 나의 힘이야, 넌 나의 보배야

천년지기 나의 벗이야.

친구야 우리 우정의 잔을 높이 들어 건배를 하자.

같은 배를 타고 함께 떠나는 인생길.

네가 있어 외롭지 않다......”


간혹 미나리꽝이 보이는 것이 많이 내려왔다.

종진이 손길이 여기까지 닿았나.

커텐을 살짝 열어주며 보여주는 성산의 얄미운 풍경.

마을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남자는 말합니다.

고맙고요, 감사해요.

오직 나만 아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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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 앞 산지해장국.

은희네도 미향도 제쳤다.

새콤한 깍두기, 배추김치.

양도 부드러운 내장까지 원탑이다.

오늘은 해장으로 막걸리도 한잔.

흐려지는 일출봉, 흐물흐물 해지는 고주망태.


걸어보고 싶었던 광치기 해변, 오늘은 허락하지 않는다.

무섭게 파도가 밀려온다.

급하게 서는 호자 렌트카.

진짜 좋은 구경 할 뻔했다 친구야.

바다는 차를 쉽게 삼켜버리지.


“사랑이 떠나거든 그냥 두시게

마음이 떠나면 몸도 가야 하네.

누가 울거든 그냥 두시게

실컷 울고 나면 후련해질 거야.

아 살다가 보면 하나씩 잊혀지다가

아 살다가 보면 까맣게 잊어버리지.

지나간 사랑은 지워 버리게

그래야 또 다른 사랑을 만나지.

자네는 아직도 사랑이 아픈가

망각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지.

사랑을 묻거들랑 말해주시게

후회하더라도 한번 해보라고.

이별을 묻거들랑 거짓말하시게

아프긴 하여도 참을만 하다고.

아 살다가 보면 세상을 원망도 하고

아 살다가 보면 세상을 고마워도 하지.

지나간 상처는 잊어버리게

그래야 또 다른 행복을 맛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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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리를 지나

세화해안을 지나

별방진은 비 때문에 또 보기만 하고

해녀의 집이 몇 발짝만 지나도 서 있는 월정리를 지나고

비취색 김녕 해수욕장도 천천히 지난다.

바람과 비와 함께.


함께 떨어질 때는 버티지 말라

떨어지고 나면 뒤돌아보지 말라

차라리 살아가야 할 새길을 찾아라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서두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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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벽에 흰 당나귀

다시 가고픈 곳을 들르는 복습을 하고 있다.

푸짐한 말차 빙수.

바다도 하늘도 구분할 수 없는 먼먼 허공.

여기에 있는 지금,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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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해수욕장을 지나다 들른 해녀의 집.

소라 전복 문어가 어우러진 모듬회.

소주가 무려 두 병.

그칠 줄 모르는 비여, 바람아.

송별회를 너무 거나하게 하는 것은 아니냐.


“우연히 만났네, 첫사랑 그 남자를

추억에 흠뻑 젖어 함께 춤을 추었네.

철없던 세월이 그리워.

행복했다 물었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뚝 흘리던 그 사람.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말을 해놓고 안아주었지.

정말 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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