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5
2012.01.04
<12>
- 2112년 1월 4일
갈기를 세우고 한참을 달려온 화가 덜 풀린 바다는
악을 쓰며 덤벼들었다가 하얀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진다.
달빛도 없는 긴긴밤을 혼자서 상대하는 저 검은 바위가 지쳐서 헉헉거리고 있다.
흰옷을 둘러쓴 해안 길도 파고드는 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바닥은 지글지글 끓어 고슬고슬하게 젖은 옷이며 배낭을 말려 놓았지만, 외풍은 어찌나 세었는지 코가 얼얼하다.
먹을 것 하나도 없이 TV만 쳐다보는데 해는 검은 바다 끝 구름을 어느새 올라타고 있다.
8시가 조금 넘었다.
발로 길을 비벼보면 얼음이 밀린다.
이대로는 자전거를 타는 것은 무리인데, 해가 쨍쨍하게 비쳐도 시원치 않은데, 수시로 눈은 퍼 붙는다.
10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잘못하면 여기서 하루를 더 묵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상한 남편이 되어 설거지도 하고 이불도 개고 왔다 갔다 분주한데 갑자기 아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잡히는 것이 없다.
나긋나긋하게 감겨 오던 천사 같던 마누라는 어디 가고 밖에서 저녁 내내 부는 바람보다 더 무서운 바람이 되어 있다.
고산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서니 바람은 정면으로 달려든다.
시속 5km. 장불재를 올라갈 때 속도다.
뒤에서 따라오는 아내는 점점 멀어지고, 사방 가릴 곳 없는 벌판을 달려온 바람은 자전거 바퀴를 길 밖으로 휙휙 밀어낸다.
차귀도 방향으로 계속 해안도로를 가는 것은 도저히 무리다.
고산으로 들어가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겠는데, 멀리서 손을 털면서 일어나는 아내가 보인다. 바람에 날려 잘못했으면 고랑으로 쳐 박 힐 뻔했다.
식당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바람 때문에 일을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낮술로 시간을 죽이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는 죠리퐁을 사다 주어도 풀리지 않은 저 안면 근육.
수간 50만 볼트의 번갯불이 내 눈에서 튀어나오지만, 천둥은 참는다.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폭발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해장국을 시켰는데 육개장이 나온다.
자리돔 젓이 무지하게 짜지만, 밥 위에 올려 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다.
“막걸리 한 병 주세요.” 아내의 주문이다.
화해하자는 모양인데, 영문을 모르겠지만 하여간 다행이다.
바람을 타고 얼굴을 때리는 우박은 폭탄이다.
얼굴을 숙이고 이제는 자전거를 타지도 못하고 끌고 간다.
그것도 앞으로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식당 주인의 버스에 자전거를 실어준다고 말이 자꾸 날 유혹한다.
1132번 지방도를 간혹 차들이 놀리며 지나간다.
다행히 자전거 도로가 있어 덜 위험하다.
선인장과 보라색 제주 무(콜라비)가 온 밭에 가득하다.
바람이 점점 옆쪽에서 불어오는 것을 보니 한림 쪽에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시속 12km.
우박도 그쳤다. 한고비는 넘은 모양이다.
<13>
내 생애에 가장 센 바람과 씨름하느라 전신이 욱신거리고 머리도 띵하다.
제주도의 바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해안을 부딪치며 튀어 오르는 포말을 보면서 다가가고 싶지만 남은 일정이 걱정된다.
비양도가 보이는 협재 해수욕장은 멀리서만 지켜보고 간다.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는데도 왜 이리 소변은 자주 마려운 걸까?
여러 날 자전거를 타다 보니 전립선이 너무 눌려 조이는 힘이 떨어졌나 보다.
염치고 체면이고 가릴 것 없이 대충 선인장이 가득한 밭에 육지 남자의 주성분이 알코올인 거름을 뿌린다.
가느다란 오줌발은 바람에 휘휘 날리며 찔끔거리는데, 이거 무슨 횡재란 말인가.
네 겹으로 접힌 만원.
나같이 급한 어느 남자의 주머니를 빠져나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담에 걸려 떨고 있는 요 반가운 놈.
3시. 한림읍의 마트에서 휴대폰을 충전하고 아이스크림을 먹고도 남는다.
한림항에서부터는 다시 해안도로로 방향을 잡는다.
눈은 비로 변하고 있다.
바람은 버티는 파도를 육지로 밀어내고 있다.
곽지 해수욕장을 지나고 이름이 겁나게 슬퍼 보이는 애월을 향해 간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지만 어둠이 깔린다.
비는 우박으로 바뀌고 물먹은 옷이 무겁다.
그네를 타고 있는 배들이 머리를 비비고 있는 애월항.
적당한 숙소를 찾아야겠다.
반바지만 입고 소리를 지르며 내려오는 한 무리의 자전거 행렬.
아마 제주항에서부터 오른편으로 일주를 시작하는 모양인데 고생 좀 할 것 같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
올레 15구간과 16구간이 만나는 곳. 글로리아게스트하우스(1인 20,000원)
일반 가정집에 간판만 달아놓은 집이다.
다행히 빈방이 있어 이산가족 신세는 면할 것 같다.
애월항을 조금 지나 고내리에 있는 화영이네 집.(강추)
돼지 뼈로 육수를 내고, 모자반이란 해초를 넣어 끓인 몸국은 청양고추를 한 큰 술 풀어 먹으니 칼칼한 맛이 일품이고(8,000원),
미역에 성개알을 넣고 끓인 성개미역국(10,000원)도 쌉쌀한 맛이 별미다.
고등어구이(15,000원)에 막걸리(4,000원) 한 잔으로 건배한다.
추위에 떨었던 몸은 어느새 훈훈해지고 얼굴은 화끈거린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이불을 갠다, 청소를 한다, 평소에 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설쳐대니까.
빨리 서둘러라 재촉하는 것 같아 너무 화가 났단다.
매번 어디를 간다고만 하면 그것이 몹시 스트레스였단다. “
잘 보이려 했던 일인데 벼락 맞은 꼴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걸 느낀다.
아이들 여행 기간 일주일과 우리만의 여행 기간을 합치면 10일.
하루쯤 싸우는 것도 추억이고, 오랜만에 속을 다 보여주고 또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지겹지도 않은지 눈비는 쉬지 않고 75도의 각도로 달려든다.
숙소로 가기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바다를 보고서 졸고 있는 무인 cafe(산책)가 보인다.
몇 개의 의자, 아이보리색으로 단장한 실내를 고소한 커피 냄새가 온몸을 전율케 한다.
“귤피차와 아메리카노 2잔”
새 여자가 되어 나긋나긋 휘어지는 아내.
실내를 꽉 채운 스티커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렵게 빈틈을 찾아 언젠가 다시 올 어느 날 우리만 찾을 수 있는 곳에 마음 한 조각 소중히 붙여 놓는다.
샤워장을 겸한 화장실 하나, 눈치를 보면서 써야 하는 게스트하우스.
거실을 바라보고 옹기종기 잠든 방.
손발과 고양이 세수만 하고 대충 자리에 든다.
좋은 내일 날씨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