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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Sep 19. 2023

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6

2021.01.05

<14>

- 2012년 1월 5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고, 눈은 까칠까칠하다.

며칠째 볼일을 보지 못한 아내는 요가로 장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실패했는지, 절대로 서두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죽은 듯 선잠을 자는 날 깨운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어둠을 쫓으며 또 하루를 시작한다.

다행히 눈은 그쳤고 길은 얼어있지 않다.

흰 모자를 꾹 눌러쓴 한라산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고내리에서 하귀리까지 해안도로.

아직 손길이 덜 닿아 풋풋한 쑥 냄새가 날 것 같은 한적한 해안가를 깨끗한 콘도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날씨 좋은 날 해넘이를 구경해도 정말 좋을 것 같은 곳이다.

어둠 속에서도 바위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은 여전하지만, 확실히 힘은 많이 빠져있다.

끈질기게 앞을 가로막던 바람도 어느새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이호 해수욕장을 지나 제주공항이 보이는 도두동 도리식당.

김치찌개와 순두부를 시킨다.

평상시에도 밤 10시 넘는 시간에 문을 여는 곳은 드물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더 빨라진단다.

제주도 사람들도 그만큼 바람을 무서워해서 그렇단다. 

어제 아내가 바람에 넘어진 곳이 수리봉 기상대인데, 제주에서 가장 바람이 센 곳이란다.     


용두암을 지나 제주항을 감고 제주시로 들어서는데 어째 눈에 많이 익는다.

탑동이면 25년 전 신혼여행을 와서 마지막 잠을 잤던 곳이다.

함께 왔던 H형 부부는 떠나고, 친구들이 준 사탕 부케를 찾으러 간 아내는 비행기 시간에 늦어 하루를 더 묵게 된 파레스호텔.

그때는 이 근방에서 제일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한 블록 더 매립됐는지 덩치가 큰 녀석들에 가려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다.

늘어가는 주름과 흰 내 머리카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자전거 대여점에서 바퀴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 1132번 지방도로로 안내받는다. 

오늘 안에 성산까지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조천을 지나 함덕까지는 뒤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달린다.

함덕을 지나면서부터는 도로 정비공사가 한참이다.

자전거 도로도 없이 2차선 차도 가장자리로 간다.

경적을 울리며 화물차가 휙 지나가면 자전거는 휘청거리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뒤에 오는 아내가 걱정이다.

다시 해안도로로 나가자.


                                                                                         

<15>     

김녕 읍 도착. 오후 1시.

좁은 도로와 싸우며 정신없이 왔더니만 출출하다.

읍 초입에 홍어찜, 해물파전이라 써진 간판만 보고 무작정 들어간다.

둘러보고 가야 하는데 보자마자 결정해 버린 내가 못마땅하지만 참아주는 눈치다.

룸살롱을 연상케 하는 빨간색 의자가 부담되는지 아내는 자꾸 뒷걸음질이다.


멋쟁이 할머니 화투로 갑오 패를 띄고 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인데도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며 반겨주는 모습이 어째 바다 건너 동네 냄새가 난다.

해물파전(6,000원), 막걸리(2,000원), 제주에서 제일 싼 막걸릿집이다.

파전은 대형 프라이팬을 넘치고도 남을 강호동 얼굴을 하고 있다.

막걸리는 바로 목욕하고 나왔는지 그 맛이 탱탱하다.     

벽에는 조금 서투르긴 하지만 글씨며 그림이 가득하다.

김녕노인대학수료증 안에서 웃고 있는 여러 노인 속에 할머니도 보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 액자 아래쪽에 고사리가 유리 테이프로 붙여져 있다.

돌아가신 사진 속의 할아버지 묘지에서 가져온 것이고,

그림이며 글씨는 할아버지 옆에 있는 한 동네 할머니의 작품이란다.    

 

이 주점은 동네 노인들의 남은 시간을 모아 

한 잔의 막걸리에 홍어찜도 해 먹고 

파전도 부쳐 먹으며 

더 넓게 더 길게 늘여 놓은 시계방   

  

현생에서는 잡을 수 없었던 

모질고 긴 한숨을 모아 

할아버지 묘소에 키운 고사리

“왜 평생 할아버지와 함께한 

할머니 그림 위에 떡 하니 붙여 놓았어요?”

그러고 보니 그림 속의 고사리는 팽팽한데, 

아직 덜 마른 액자 위의 고사리는 

고개를 어렵게 들고 있네요


이승에서도 할아버지는 그 맘 아직 몰라주나요?

슬퍼요     

아직 덜 떨어진 갑오 패가 

초록색 담요 위에 너무 슬프게 누워있네요     


멀리 행원의 풍력 발전소 바람개비들이 신나게 돌고 있다.

바다 체험장, 요트 타는 곳이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아이들과 함께 오면 참 좋겠다 싶어 앞으로의 계획 노트에 찜해 놓는다.    

 

햇살은 많이 부드러워져 있다.

세화 해수욕장에서부터는 올레 1구간이다. 

수산시장을 들러 구경해보고 싶지만, 아내의 표정이 어둡다.

오른쪽으로는 말미 오름, 왼쪽으로는 우도가 보인다.

간혹 걷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길 외에는 개발이 거의 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다시 이곳을 꼭 찾을 것만 같다.


김대중 대통령이 찾았다는 집을 지나 하도 해수욕장에 접어든다.

“전망 좋은 땅 팝니다. 1평에 60만 원” 커다란 홍보물이 눈을 크게 뜨고 보고 있다.

몇 평의 조그마한 집이라도 짓고 자연 속에 묻히고 싶은 마음을 사정없이 비웃는다.

여기도 곧 돈 냄새 풍기는 곳이 될 것 같아 씁쓸하다.   

  

평탄한 길에서도 자꾸 쳐지는 아내.

김녕을 출발하자마자 꼬리뼈 위의 그 보들보들한 살이.

나도 자주 만질 수 없는 그 살이.

눈보라,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단다.

본격적인 자전거 입문 두 달 만에 3박 4일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잘 참아준 것이지.     

나는 너무나 한가롭게 하나라도 눈에 더 넣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간다.

아내는 매 순간 고통 속에서 가까워지지 않은 일출봉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우도를 보면서 반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성산포에 이른다.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차가 있는 처음 밤을 보냈던 곳. 성산포관광호텔. 

3시 40분.       

자전거는 창고에 보관하고 305호에 여장을 푼다.


이른 저녁 먹으러 간다.

차를 타고 가니 이렇게 편한데, 그동안 생고생을 했다.

나주식 상차림이라는 식당에서 흑돼지 오겹살로 영양 보충을 한다.

어제저녁 배달되지 않은 통닭에 한이 맺힌 아내는 기어이 딱 한 곳 문을 연 통닭집을 찾아간다.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겠다.

인상 좀 푸세요. 주인아줌마.    

 

야성미 넘치게 수염도 깎지 않았다.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각오를 단단히 해보지만, 자꾸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아니, 아니, 아니 되옵니다.

자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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