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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Sep 19. 2023

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7

2012.01.06

<16>

- 2012년 1월 6     


부지런 떠는 아내 때문에 눈을 뜬다.

새벽 5시.

결국 아니, 아니, 아니 되는데 잠을 자버린 모양이다.     


일출 시간이 7시 37분이란다.

성산에서 자면서 일출을 보지 못하면 일출봉에 너무 미안하지.

단단히 무장하고 어둠을 헤치며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가. 완전 새벽 시장판이다.

설마 했는데 어김없이 입장료(1인 2,000원)를 받는다.

가만히 앉아서 수금하는 저 양반 아마 제주에서 제일 먼저 돈 버는 사람일거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아직 몸이 덜 풀린 관절이 삐걱거린다.

발 디딜 곳도 없는 일출봉 정상.

방송국에서 커다란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있다.

새해 들어서 아직 일출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단다.

동쪽 바다 끝에 시선을 모으고 바람을 피할 장소를 골라 몸을 부린다.     

두꺼운 검은 구름 띠가 수평선 위에 차분하게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바다 위에는 샛별과 이야기하고 있는 고기잡이배들의 불들이 소란스럽다.

아내는 “전생에 다하지 못한 업을 이생에서 쌓고 있는 것 같아 고기 잡는 어부가 세상에서 제일 슬퍼 보인단다. 운명으로도 어찌할 수 없어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파도와 바람 속에서 다음 생에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남은 숙제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직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해, 주위는 많이 밝아져 있다.

해는 구름 아래에서 나오려고 부지런히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나 보다.

지리산 일출처럼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나 보다.   

  

전복죽(12,000원)은 잘 불린 쌀과 계란, 잘게 썰어 넣은 전복이 씹을 때마다 오독오독 질감이 좋고 속도 따뜻해진다.

갈치구이(10,000원)도 살이 통통하고 부드럽고 삼삼하게 간이 되어있어 좋다.

아침부터 물회는 조금 부담이 될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룬다.    

 

어차피 내일 성산항에서 배를 타야 하니 숙소는 이곳에서 하루 더 자기로 하고 자전거는 창고에 보관한다.

남원에서 귤(10kg에 20,000원), 쵸코렛(3box 10,000원), 오미자 차(15,000원) 구입.

일주일씩이나 집을 비웠는데 아이들 보기도 조금 미안해서다.


마라도를 갈려면 모슬포항에서 12시 배를 타야 하는데 여유를 부리는 아내.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지만 서두를 수가 없다. 

재촉하는 내 못된 습성을 고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많은 수행이 필요하다. 

여행은 바로 수행의 과정이기도 한 모양이다.     


11시 40분. 모슬포항 도착.

표를 사고, 배 타는 곳까지 뛴다.

풀 코스를 완주한 나도 헉헉거리는데 아내는 죽을 맛일 것이다.

산방산과 송악산을 뒤로하고 제법 바람이 있는 일렁이는 바다로 배는 나선다.


멀리 가파도가 보인다.

빨간색, 파란색 지붕들이 바위에 붙은 굴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

너무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 큰 파도라도 밀려오면 금방 물속으로 잠겨 버릴 것 같다.

배의 매점에서는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 총각이 그 색시한 현아가 부르는 트러블메이커를 틀어 놓고 오징어를 굽는다.

냄새에 유혹됐는지, 총각에게 반했는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줌마들.

물이 무섭다며 아내는 또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용띠가 물을 무서워하다니.

옷을 빼앗긴 선녀처럼 나에게 영혼을 빼앗긴 용이, 아마 물로 돌아가기가 싫은 걸 거야.     


12시 40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살레덕 선착장. 

간판을 보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전신이 찌릿해진다.

살레시오 선생님인 내가 오기를 이제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가는 배는 2시 30분으로 예약을 해놓아 시간은 널널하다.

배에서 쏟아진 사람들은 오른편 마을로 들어가지만 우리는 왼편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참이다.


마라도에 오면 짜장면을 먹어봐야 한다는데, 현금이 4,300원 밖에 없다.

배의 총각이 이곳은 카드결재도 안 된다고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선인장 자생지를 지나 등대다.

세계의 등대를 축소해서 설치해 놓았는데, 언젠가는 다 가보게 되겠지.     

대한민국 최남단에 태평양을 향해 단정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는 성당.

문이 열려있고 예수님상이 보인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한다.

“재수를 시작하는 둘째, 이제 자기 갈 길을 찾았다고 하니 최선을 다해주기를.

중3짜리 막둥이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기를.

큰딸 시집을 가든지 취직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는 꼭 이루기를“

자식들을 먼저 생각하는 나도 별수 없이 이렇게 늙어 가고 있나 보다.


봉헌함에 전 재산 4,300원을 넣겠다는 아내를 말린다.

오늘은 마음만 넣고 우선 급한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먹어보아야 한다고.

성모님 우리 마음을 다 알고 불쌍히 여기셨는지 성당을 나오다 아내는 길에서 그 귀한 100원을 줍는다.

계속 땅을 보고 갈 것이냐? 지금이라도 봉헌함에 모두 넣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17>     

바위를 건너뛰며 섬 끝자락까지 내려간 사람들. 

최남단 중 최남단.

시린 물을 손에 담으며 무슨 생각들을 할까?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몸이 반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가방을 든 해녀의 집”이 보인다.

마라도에 하나밖에 없는 짜장면집이라고 TV에서 본 것 같다.

뉴욕타임지 1면에 소개된 해녀 일을 6대째 이어온 김재연씨. 33세로 최연소 해녀란다.

지금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모슬포항에 나가 있단다.

할머니가 직접 잡아 올린 해산물을 파는 가판대도 불법건축물로 철거되었다.

지금은 남동생들과 할머니가 운영하고 있다.     

창피한 기분과 4,400원을 두 손에 꼭 쥐어 호주머니에 넣고, 살짝 문을 열고 주인 총각에게 간다.

아내는 차마 따라오지도 못하고 먼바다만 쳐다보고 있다. 

급하게 오느라 현금을 챙기지 못했는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모르는 척 카드결재도 가능하냐고 묻는다.

카드결재는 안 되고 계좌이체를 시키면 된다고 선선히 어서 오시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것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사람한테 뭘 믿고 그럴까.

하긴 내가 좀 선하게 생기긴 했다.

짜장면(6,000원), 짬봉(7,000원), 조껍데기 막걸리(5,000원).

양심상 해산물까지는 시키지 못하겠다.

정으로 범벅이 된 음식은 혀를 녹이며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뱃속에 똬리를 튼다.


사삭스럽게도 바람은 왜 이렇게 시원한가.     

초콜릿 전시장을 지나 선착장으로 가는 길.

30여 가구가 고개를 숙이고 모여 있다.

절, 교회도 보이는데 아마 이곳 사람들을 위해서만 지어진 건 아닐 것이다.


그네와 미끄럼틀, 손바닥만 한 운동장, 교실 두 칸. 마라분교다.

학교보다 수만 배 큰 바다를 보면서 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도시의 아이들보다 더 크고 높을 것 같은데, 몰라 또 너무 심심해서 풀이 죽어있을지도.  

   

하나밖에 없다던 짜장면집이 10여 곳은 넘어 보인다.

섬사람 같지 않은 때깔 벗은 아줌마들 “힘들어 죽겠다.”며 손목을 잡아끈다.

순간 기분이 확 잡친다. 늦은 시간 빨간 등불 술집이면 또 몰라.

강호동, 유재석, 이름은 잘 모르지만, 눈에 익은 사진들이 붙어있는 간판들은 서로 원조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우고 있다.

아마 마라도는 세계에서 짜장면 잘하는 곳으로 7대 명소에 든 모양이다.     


아슬아슬하게 갯바위 위에서 크릴새우로 고기를 유인하는 고기 사냥꾼들.

바위를 때리고 솟구쳐 오르는 하얀 물거품이 키를 넘는다.

고기들이 당신들을 노리고 있는지는 알고 계시지요.     

마라도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견디다 못해 물속으로 도망쳐 버리면 최남단은 가파도가 되는 건가? 그 다음은...        

1135번 국도를 따라 안덕면에 있는 소인국테마파크로 향한다.

세계의 유명한 건물, 탑, 다리들을 축소해서 전시해 놓았다.

우리나라의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전혀 손색이 없다.

올 때마다 조금씩 규모가 커져가고, 내용도 더 풍부해지는 것 같다.     


평화로를 따라 중 산간지대를 관통하며 용담, 이호 해안도로로 간다.

둘째가 꼭 가보라는 곳 닐모리동동(내일도 모래도 정성을 다해 기다린다는 뜻) 레스토랑.

통유리 밖은 온 바다를 구름이 가득 채우고 있다.

볼이 붉으스름해지는 것이 노을이 지고 있는 모양이다.

문화센터를 겸한 실내는 넓고 고급스러워 목소리를 낮추어야만 할 것 같다.

한라산 빙수(10,000원)

우유를 얼려 곱게 갈아 예쁜 쟁반 위에 용암이 아닌 팥을 품은 한라산을 만들었다.

녹차 시럽을 부어 먹으면 시원하면서도 어찌나 달콤한지 양이 좀 적은 것도 용서가 된다.

솜사탕 아포카토(7,000원)

큰 컵에 솜사탕이 올라타고 있다.

솜사탕을 조금 먹다가 커피 원액을 위에 부으면, 순간 확 불이 타듯이 녹아내리며 아이스크림처럼 동그랗게 말린다.

커피 맛과 솜사탕 맛이 어우러지는 환상의 조합이다.

맛있기는 한데 어떻게 말로 할 수가 없네.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다. 

도청이 있는 중심가를 돌고 돌아 노형성당 옆, 말고기 전문점 “사돈집”

특정식(1인당 30,000원) 

사시미 : 엉덩이 살로 겨자소스에 찍어 먹으면 퍼근거리는 게 방어 맛.

육회 : 소고기 육회와 비슷한데 조금 질김.

구이 : 호주산 불고기와 비슷.

스테이크 : 소스 맛이 강해 특별한 맛을 알 수가 없음.

샤브샤브 : 말값의 절반이 된다는 뼈로 만든 육수에 각종 야채를 넣고 끓여             얇게 썰어낸 고기를 대쳐 먹음. 칼칼하고 시원함.

후식 : 말 액기스. 말만(?) 해질 것 같아 원 샷.

한라산 소주로 건배하려다 운전해야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아내.

아직도 자전거를 타고 있는 것 같단다.

노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정갈한 음식들, 대접을 잘 받은 기분이다.

나와서 보니 주변이 온통 말고기 집이다. 

히히힝 말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입을 가리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경찰을 볼 수가 없는 거리.

어제 오후에 갔던 길을 따라 성산으로 간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

말고기도 먹었겠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니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난다.

두 손을 말아쥐고 어금니를 꽉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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