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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Sep 19. 2023

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4

2012.01.03

<9>

- 2012년 1월 3     


7시 기상.

어제저녁 새섬에서 돌아오는 길.

간단히 멍게에 소주 한잔하고 싶었는데, 모두 모둠(35,000원)으로만 팔겠단다.

하는 수 없이 첫날 간 “칠십리맛집”(강추)에서 고등어조림에 막걸리 한잔 걸쳤다.

온 벽을 가득 메운 메모에 우리도 하나 추가.    

 

포장해 온 조림을 데우고 마트표 햇반으로 대충 아침을 해결한다.

해장으로 막걸리를 권하는 아저씨, 오후부터는 날씨가 나빠진다고 한다.


서귀포항 쪽으로 다리를 넘어 언덕길을 오른다.

어제저녁 산꼭대기까지 이어지는 가로등을 보고 겁을 먹었는데, 한재골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이틀째이지만 생각보다 다리 상태는 괜찮다.

기어변속까지 익숙해진 아내도 여유 있게 달리고 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올레 7구간. 

자전거 일정을 마치면 한번 걷고 싶다고 했던 아내.

오늘 자전거를 들고서라도 소원을 들어주겠다.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온 힘 좀 쓰게 생긴 우뚝 솟은 바위 

외돌개

병풍처럼 둘러선 날 선 바위들이 감싸고 

그 뒤로 아름드리 소나무

고개를 숙여 묵념한다

막 떠오른 해

외돌개 머리에선 빨간 불꽃이 피어오른다

바다의 신께 

그렇게 기도하고 있구나     


문섬을 바라보며 파아란 파도와 깎아지른 절별이 만나 밀고 당기며 노는 해안 길.

나무로 자연스럽게 잘도 만들어 놓았다.

올레빵, 어묵, 차, 막걸리.. 이른 손님을 기다리는 포장마차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세계가 찾는 제주, 세계로 가는 제주”는 화장실까지 와서 노려보고 있다.

자전거를 끌며 때로는 계단을 내려가고, 고급 콘도가 즐비한 골목과 귤밭 사이를 오르기도 하며 한가롭게 부드러운 햇살을 즐기며 간다.   

  

범섬이 보이는 해안가.

야자수들이 숲을 이루는 곳, 소나무 사이에 포장을 두르고 간신히 서 있는 집.

7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군대에서 다리를 다쳐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마흔넷에 돌아가시고,

혼자서 자식들 다 키워 모두 육지로 보냈단다.

아직도 물질을 하시는 할머니, 물질 경력 50년.

손수 잡아 올린 홍해삼과 소라(10,000원), 우리 쌀 제주 막걸리(4,000원)를 푸짐하게 내놓는다.

붉은 테두리를 두른 홍해삼은 간간하고 오독오독 씹히고 소라는 부드럽다.

멍게는 모두 통영에서 들어온단다. 

그래서 멍게만은 팔지 않았던 모양이다.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 고무장갑을 뒤집어 목을 잡고 둘둘 말면, 두두둑 소리를 내며 펴진다.

할머니 인생도 저렇게 쭉 펴졌으면 좋겠다.     


                                                 

<10>     

돔배낭골을 지나 중문을 향해 간다.

연두색 경찰복이 거리를 꽉 메우고 있다.

요즘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강정마을인 모양이다.

헬멧이 없어 혹 단속이나 당하지 않을까, 가슴이 철렁한다.

일단 뒤도 보지 말고 째자.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멀리 중문해수욕장이 보이고 무지무지하게 큰 호텔과 콘도가 일단 기를 확 꺾어 놓는다.

두리번거리며 나가는 길을 찾다 그만 골프장까지 오고 말았다.

한국말이 서툰 안내양이 가르쳐준 대로 길을 잡는데 가늘게 비가 온다.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빨리 점심 먹을 곳을 찾아야겠다.

칠선녀가 그려진 천제연 폭포 앞다리를 조금 지나니 토속음식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흑돼지오겹살(1인분 15,000원)과 한라산소주 1병(3,000원).

흑돼지는 성장 기간이 다른 돼지의 2배인 10개월이라 값이 다소 비싸단다.

두꺼운 오겹살을 주인장이 직접 노릇노릇 구워준다.

기름소금을 살짝 묻혀 씹으며 소주 한잔 걸치면 목구멍을 타고 찌르르 전신이 감전된다.

내가 먹어본 돼지고기 중 단연 최고다.(강강추)


비는 점점 더 굵어지는데 걱정이다.

지도를 펴 놓고 고민하는데 주인장 대정읍까지는 45km 정도인데 길이 내리막이라 어렵지 않을 거란다.     

상의는 비옷으로 바꾸어 입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달린다.

해안도로를 달리고 싶지만, 날씨가 심상치 않아 일단 1132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안덕계곡을 지나니 왼편으로 산방산이 보인다.

아마 비는 멈출 것 같지 않다.

송악산 가는 길 표지판을 보면서도 아쉽지만 대정항까지는 달려보자.

모슬포항도 그냥 지나자.

고산까지는 가야 할 텐데.


오후 3시.

빗속을 3시간쯤 달린 것 같다.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얼얼하다.

무릉 2리. 

구멍가게에서 어묵(6,000원) 막걸리(3,000원)를 시켜놓고 무슨 말인지도 모를 사투리를 해석하느라 바쁘다.

제주도 중에도 이곳은 완전 깡 촌이란다.

마음씨 좋게 생긴 할아버지에게 대낮에 눈 벌겋게 뜨고 바가지를 쓴다.      


이제 우박이다.

윙윙 바람 소리가 귀를 아프게 한다.

아무리 힘을 주고 달려도 시속 6km다.

허허벌판에 하늘은 캄캄한데 아내는 턱을 덜덜 떨고 있다.

결단을 내려야겠다. 

일단 바다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그래야 잘 수 있는 숙소가 있을 것 같다.

자전거가 밀리고 이제 바람을 타고 달려드는 눈에 눈을 뜰 수가 없다.

큰일이다.    


                                                                           

<11>     

반듯한 집 두 채가 나란히 보인다.

차를 세워 놓고 수리하는 집주인에게 하루를 부탁해 보는데 예약 손님만 받는단다.

무섭게 달려드는 파도를 보면서 포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뒤바람을 맞고 가는 길은 덜 힘들어 다행이다.

한라산 노루 1쌍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마을에 내려오듯이 간신히 찾은 집.

섬마을민박(1실 70,000원).

곱게 생긴 주인아주머니는 고흥이 고향이란다.  

부동산 사무실까지 겸하고 있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고요하고 깊어 품위가 있다.

아저씨는 카드결제도 하지 못하고 나이가 훨씬 들어 보이는 것이 무슨 사연이 있을 법하다.     

주변의 음식점이 있기는 한데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 문을 일찍 닫았단다.

젖은 옷들을 보일러를 최고로 높여 방을 데우고 방바닥에 펴놓고 말린다.

밖을 보니 전망은 끝내준다.


더 어둡기 전에 다시 무릉2리로 바람과 눈을 뚫고서 떠난다.

고등학생쯤 보이는 다섯 명이 자전거를 끌고 가고 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저 녀석들은 어디서 잘까? 걱정이다.

컵라면 2개, 맥주 큰 걸로 1병, 햄, 치즈, 과자 3봉.     

0.3mm 두께로 햄을 썰어 프라이팬에 올리고, 적당히 달구어지면 뒤집어 놓고 치즈를 햄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썰어 위에 올리면 훌륭한 안주가 된다.

어설픈 솜씨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안주라며 감격해한다.

텅텅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러브 샷.

사랑은 목을 타고 흐르고 행복은 넘어가는 보이지 않은 햇살을 닮아 빨갛게 얼굴에 핀다.

컵라면으로 때우는 식사지만 바라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르다.

아이들도 아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일 모래인데 참 청승이다.

아무도 몰래 도둑 여행을 온 기분이다.

요가로 몸을 풀고 서로 안마를 해주면서 밤은 달달하게 익어가는데.

밖에서는 눈이 쌓이고 있다. 아무래도 내일은 늦게 출발해야 할 모양이다.


쿵 쿵 

성난 파도는 검은 바위를 향해 머리를 찢는다

그 소리 내 귀에는   

  

바다에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영감을 생각하며

내려가지 않은 답답한 가슴을 치는 소리     

아비 없는 호래자식 만들지 않으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엉덩이 때리는 소리   

   

아직도 힘은 펄펄한데

밤은 길어 자꾸만 뒤척이고

채워지지 않은 가슴을 한숨으로 덮으며

머리를 찢는 소리   

  

참 슬픈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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