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 민이

2023.12.21. 목

by 고주

모락산 밑, 유격장 옆 부대에 있을 때

무던히도 추운 밤에

근무 나가려고 옷을 몽땅 껴입고 뒤뚱뒤뚱 상황실 앞에 모여 신고하고

산 쪽으로 올라 호에 들어가면

찾아오는 간첩보다 무서운 추위

엄지발가락 끝을 떼어먹겠다고 달려들고

첩첩으로 두른 경계벽을 뚫고 살갗으로 접근해서 닭살을 만들고 마는

소름 끼치던 반달 아래 쨍하고 하늘을 찢던 그 차가운 공기

바람 한 점도 없었던 날것의 그 밤

그날을 생각나게 하는, 하필이면 모락산이 보이는 전철역에서 느끼는 추위다

제출한 출력물에 붙은 정정을 알리는 붉은 단풍나무잎들

진학 진로 특기사항부터 손을 댄다

보내줬던 검사지를 찾아 복사하고 붙이고

기존의 내용을 수정하고

잔글씨들을 집중해서 보느라 눈물이 앞을 흐린다

눈도 따로따로 감아지는데

다음은 주제 선택반

너무 길게 쓰지 말라던 부장님의 말을 왜 듣지 않았을까?

정성스럽게 자세하게 쓰겠다는 가상함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그만큼 틀린 곳도 많고 중복되는 글귀도 많다

줄이는 것도 일이다

읽고 또 읽고

통계까지 진도를 마치고 남은 30분

반장에게 시간을 준다

합창 연습에 대해 회의하겠다 한다

센터에 서는 자천한 두 아이는

평소에 럭비공처럼 아무 곳으로 튀는 훈이와 혁이

흩어지는 의견을 모으겠다고 나서는 놈은 헛소리 잘하던 철이

어찌나 빤히 쳐다보고 있어 혹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만지게 하는 모범생 민이를 추천하는 남자아이들이 많다

태블릿으로 노래를 튼다

쿨의 아로하인데, 아로하가 하와이 말로 사랑이라나

반 전체가 따라 부르다 민이 부분에서 민이에게 독창을 주문한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태블릿 화면을 보여주는 철이

노래를 부른다

남학생들이 터져 나오는 환호를 입으로 틀어막는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

모두 맘 한구석에 민이를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썩 잘하는 노래가 아닌데도 야유하는 소리 하나 없다

다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떠들면 2학년 시험 보는데 방해가 될까 조마조마했는데

너무 진지해서 놀란다

까불이들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디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들보다 까부는 녀석들이 더 낫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 아이들이 뭐라도 한다

지켜보는 것, 기다리는 것

내 생각이 너무 앞서가 조급한 것이 문제였구나


오후 4시 30분까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매달렸건만

다 끝내지 못했다

빨리 들어가시라고 등을 떠미는 부장님

내일 또 하자

또 몇 차례 더 수정하게 된다니

손으로 쓸 때가 좋았다

3년의 기록이 8절지 한 장이면 끝이었으니까

지금은 30장을 훌쩍 넘기는 학생도 있다

중학교가 이런데 고등학교는 전쟁터라고 한다

교직 36년 동안 제대로 해보지 못했으니 기회를 주겠다는 엄명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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