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동생이 왔다. 교포 아줌마들 넷이서 2년 동안 여행계를 만들어 각자 5천 불씩 마련한 다음 한 달 일정으로 한국에 온 거다. 1년 전, 한국 올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네 명이 한 달 내내 같이 여행할 것은 아닐 테니 시간을 내어 동생과 여행도 하고, 녹음에 묻힌 우리 동네도 같이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잘 여유도 없었다. 다른 미국 교포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국에서 아시아 여행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일단 한국에 오면 먼저 싱가포르, 대만, 일본을 관광하고 남은 시간에 국내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인천공항을 왔다 갔다 하면서 틈이 생기는 날에는 쇼핑하기 바빴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정이었는데 숙소도 서울시청 근처 호텔이라 쇼핑하기 딱이었다. 시청 앞이면 그 앞에 맑은 물이 흐르고 일급수 물고기까지 산다는, 도심에서 보기 어려운 청계천 개울가를 온전히 걸어서 동대문 시장, 답십리까지 서울구경을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밤이고 낮이고 시간만 나면 남대문시장, 명동 올리브 영, 코스트코 등등에 집중했다. 싸기도 하고 품질도 좋다고 화장품도 사고 홍삼도 사고 10달러 이내의 잡동사니 선물도 한 보따리씩 샀다고 한다.
30년 전, 동생을 만나러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우리나라에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쇼핑센터가 있고 온갖 물건이 다 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뭘 사야 할지 몰랐다. 2025년 현재, 온 세상이 서로를 향해 활짝 열린 지금, 뭐 그리 살 게 많을까? 한국에 있다면 미국에도 다 있을 텐데. 아무튼 동생 덕분에 나까지 생각지도 못하던 쇼핑을 하게 되었다. 동행이 있고 일정이 다 정해져 있어 혼자만 우리 집에 와 있을 순 없다고 하여 우리는 겨우 한나절만 만났다. 만나자마자 동생은 내 얼굴을 보고 언니도 얼굴 좀 가꾸라고, 요즘 화장품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왜 화장도 못하고 사느냐고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최근 쓰는 화장품 중에 '리들샷'이라는 크림이 있는데 같이 온 아줌마들한테 알려줬더니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걸 얼굴에 바르면 잠깐 따끔하면서 피부에 스며들어 다음날 아침이면 얼굴이 아기처럼 보들보들해진다고 한다. 아줌마들은 동생의 얘기를 듣자마자 올리브 영으로 달려가서 이 상품을 몇 개씩이나 샀다고 했다. 그리고 언니에게도 꼭 하나 사주고 싶다면서 그 짧은 만남에 올리브 영을 갔다. 당최 안티에이징이라는 말에 공감을 못하는 나, 사실은 게을러서, 귀찮아서 주변에 널린 게 화장품 광고임에도 나 몰라라 하고 살았는데 막상 동생한테 그것을 선물받고 나자 호기심이 일었다. 진정 피부가 고와지고 더 젊어질 수 있을까?
이것을 바른 후에는 보충하는 영양크림을 덧발라줘야 한다는 말을 듣고 쇼핑센터에 간 김에 화장품 코너에 들렸다. 내 말을 들은 직원은 수분크림을 권했다. 글쎄요? 화장품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고 망설이자 직원은 분명하고 확고하게 말했다. 잘 모르시면 제 말만 믿고 사세요. 리들 바른 후에 수분크림 바르면 됩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는 큰 용량의 수분크림 두 개를 샀다. 다음 주에 태국에 가는데 가벼운 선물로 뭘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문득 K 화장품이 유명하다니 리들샷과 수분크림이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로 리들샷을 하나 더 사기 위해 올리브 영에 갔다. 내 말을 들은 직원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들샷 바르고 수분크림 바르면 절대 안 됩니다. 여기 재생크림이 있어요. 리들 다음에는 이 재생크림을 발라줘야 진정한 효과를 볼 수 있어요. 아휴, 수분크림 두 개나 샀는데... 글쎄 리들에 수분크림은 안된다니까요. 어찌나 확신에 찬 목소리였는지 나는 리들에 더해 재생크림 두 개를 또 사고 말았다.
오로지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밖에 없던 나의 변변찮은 화장대위에는 전에는 없었던 리들샷과 수분크림, 재생크림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동생에게 수분크림이 아니라 재생크림을 발라야 한다더라고 말해줬더니 그게 맞는 거 같다고 그 재생크림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동행들이 무슨 크림인지 알고 싶어한다는 거였다. 사실 효과 유무는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전혀 모르겠다. 어쩌면 종종 까먹고 안 발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안티에이징 자체를 믿지 않는 나의 부정적인 마음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게 부정적인데 난 왜 그리도 쉽게 수분크림도 사고 재생크림도 샀을까? 가게 직원들의 확고한, 신념에 가득 찬 권유가 그동안 애써 눌러왔던 나의 소비욕구를 조장한 건지도 모른다. 유명 학자들의 말대로 "아파서 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약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어쨌건 태국에서 K 화장품 선물을 받은 분은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이거 바르면 20년 젊어지나요? 나의 대답은 여전히 ... 글쎄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