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나한테 소리질러놓고 엉엉 울며 하는 말
귀여움
요즘 애들이 쉬는 시간에 교실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려고 보드게임을 개방했다.
애들이 코로나 끝물이라 쉬는 시간은 10분으로 늘어났지, 심지어 점심 쉬는 시간은 30분 더 늘어나서 자꾸 자잘한 안전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애들을 교실에 얌전히 붙들고 있는 수단으로 보드게임을 허용했더니 애들이 신나서 집에 있는 젠가며 부루마블이며 가져왔다.
오늘 점심 쉬는 시간에는 내가 화장실 갔다가 교실에 들어오니 애들 몇 명이 내게 쪼르르 달려와서 흥분한 채 하소연했다.
-선생님 쨰가 이거 뿌셨어요!!
-그래서 xx이(보드게임 주인) 울어요!!!
-근데 oo 이는 사과도 안 하고 뻔뻔하게 지 자리로 돌아가서 놀고 있어요!!
순식간에 얼추 상황 파악이 된 나는 oo이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oo 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보고 있었다. (속으론 불안한 거 다 보임)
나는 oo 이를 불렀다.
-oo아, 일로 와보세요.
그러자 oo이는 기다렸단 듯이 빠르게 나한테 왔다. 자기도 억울한 게 있는 듯 잔뜩 뿔이 난 얼굴이었다.
나는 물어봤다.
-네가 이거 부수었어요?
그러자 oo가 대뜸 소리 질렀다.
제가 안 뿌셨는데요!!!!!!!!!!!(반항)
순간 애들 다 정적되고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껏 한 번도 나한테 소리 지른 적이 없었던 애다.
나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렇게 아이가 흥분한 상태에선 일단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나는 침착을 유지한 채 나긋이 말했다.
-oo 이는 선생님이랑 위클래스로 가서 따로 얘기합시다.
그리고 위클래스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 후 옹기종기 마주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oo아 억울한 거 있어요?
그러자 애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거의 나라 잃은 수준이었다. 위클래스 선생님이 휴지를 갖다 주셨다.
아이는 휴지로 눈물을 훔치더니 말했다.
-제가 그거 안 뿌셨는데 얘들이 자꾸 제가 뿌셨다고 해요! 으흑흑 흐어헝
나는 우선 애 말을 충분히 들어줬다.
이렇게 잔뜩 울고 흥분해있고 억울해할 땐 일단 들어줘야 한다.
애는 눈물 콧물 빼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가며 자기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놓더니 표정이 좀 차분해졌다.
요때다!!!!
나는 촌철살인했다.
-애들은 oo가 보드게임 부순 게 섭섭한 게 아니라던데?
그러자 애는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오잉? 하더니 그럼 왜 '저를 몰아간 거예요'라고 물어봤다.
나는 짧게 말했다.
(이럴 땐 계속 짧게 핵심만 말하는 게 효과적이다)
-혹시 애들한테 억울하다고 얘기할 때 어떤 표정과 말투로 표현했어요?
그러자 역시 똘똘한 애라 그런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억울하다고 소리 지르고 애들이 말하는 거 무시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이 떠오른 것 같았다)
나는 얘기가 잘 먹혀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자 말을 이어나갔다.
- 선생님은 아까 oo이가 선생님한테 대뜸 소리 질렀을 때 솔직히 화났지만 일단은 참고 oo이 억울한 얘기부터 들어주고 있는데..(+시무룩한 표정 연기)
그러자 애가 갑자기 또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너무 압권이었다.
오늘의 명언.
솔직히 제가 아까 선생님한테 소리 질렀을 때 속으로 '아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엉엉 그러면 안 됐는데 엉엉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열두 살이지만 마음은 아직 애기다.
나는 속으로는 이 말이 너무 귀여웠지만 겉으론 티 내지 않고 짐짓 차분하고 해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oo이도 감정을 바로 폭파시키지 않고 선생님처럼 일단 차분하게 이야기하면서 감정을 풀어가는 연습을 해줄래요..?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끄덕끄덕)
나는 마무리 멘트를 했다.
-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요. 처음엔 쉽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냥 조금씩 조금씩 화날 때마다 감정을 한 번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연습을 시작해봅시다.
아이는 이제 완전히 안정되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이좋게 교실로 돌아왔다.
아이는 교실에 와서 보드게임 망가진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보드게임이 망가져서 울던 애도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이랑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새 다 잊음)
비록 점심시간에 밥 먹고 숨도 못 돌린 채 바로 6교시 수업을 해야 했지만 오랜만에 훈육 스킬을 발휘한 날이라 보람 있었다.
(울면서 나랑 사이 틀어질까 봐 선생님한테 소리 지르는 순간 망했다고 생각한 oo이..다시 생각해도 너무 귀여움... )
퇴근하면서 엄마한테 이 얘길 했더니 빵 터지시면서 '에구 귀여워라. 아기네 아기'라고 하셨다.
아이가 반항할 땐 당황하거나 말려들지 말고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오늘도 되새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