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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희쌤 Dec 15. 2022

아이인데 어른보다 세련된 센스와 매너를 보여주는구나..

나는 어디 가서 "저는 꽤 둔한 편이에요~"라고 말하곤 한다. 괜히 예민하다고 말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적당히 둔한 척하고, 적당히 흘려듣는 척한다. 사실은 엄청 세세한 것에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말속에 스쳐 지나가는 뉘앙스 변화에도 촉각을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초등교사를 하는 것이 처음에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우선 애들은 자신의 생각을 어른과 달리 별다른 필터링 없이 드러내는 편에다가, 행동도 꽤 거친 편이다. 아직 사회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덜 다듬어진 원석의 느낌을 풀풀 풍긴다.


어른들이 사회에서 가면을 쓰고 있다면 아이들은 가면 자체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 아이의 속이 투명하게 보이고, 설령 가면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가면이 상당히 얇고 약해서 금방 벗겨지곤 한다.


꽤 솔직하고, 거칠고, 엉거주춤한 어린이들과 지내면서 이젠 나도 어느 정도 부처의 반열에 들어섰다. 덜 다듬어진 언행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아이들의 웬만한 행동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구나~그래~오케이~' 이런 스탠스를 취할 뿐이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기보단 숲을 보자고 늘 생각한다. 아이들이란 지금 한창 다듬어지고 있는 존재이고, 어떻게 다듬느냐에 따라 보석이 될 수도, 돌멩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 보여주는 미숙한 행동들을 잘 벼려주려고 한다.


그런데 올해에는 이런 내 생각을 뚫고 나오는 아이가 있다.


어른보다 센스 있고, 어른보다 매너가 좋으며, 어른보다 훨씬 다정하고 따뜻한 사교성을 보여주는 아이가 있어서 당황 중이다.


우리 반 회장 시유(가명) 얘기다. 시유는 좀 다른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가 참 사랑이 샘솟는다고 느꼈는데 12월이 된 지금은 시유에 대해서 존경심(?)까지 들고 있다.


시유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냥 처음 본 사람들도 나중에 나한테 따로 찾아와 걔에 대해 칭찬할 정도로 눈에 띄는 아이다.


눈에 띄게 예의가 바르고, 말투가 다정하며, 참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갖고 있다. (상대방한테 뭔가 툭툭 하는 것이 없고 항상 조심스레 배려하며 행동한다.)


밑의 사진은 어젯밤 시유가 나한테 과제물을 제출하기 위해 보낸 메일 스샷이다. (사실 과제라기보단 학급 뮤직비디오를 자기가 자진해서 편집하겠다고 했는데 그 결과물을 어젯밤 보낸 것이다.)


세상에 나는 시유가 '선생님도 쉬셔야 할 텐데...'라면서 나의 휴식권을 생각해주는 것이 놀라웠다. 아직은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가 더 발달하고 있을 나이인데 이런 이타적인 말을 하다니...


(아부를 좋아하는 상사의 마음이 뭔지도 알 것 같다. 빈말이든 아니든 내 생각, 내 걱정해주니 그냥 고맙고 감동이다..)


아무리 고학년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센스 있고 매너 있게 메일을 써서 보내는 아이는 흔치 않는지라 적잖이 놀랐다. (보통 메일로 과제를 제출하라고 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냥 제목에 자기 이름을 써서 보내거나 '과제 제출합니다' 등으로 쓴다.)


나는 이렇게 시유가 사려 깊게 메일을 보내줬는데 늦은 시각이지만 답장을 안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도 사랑을 꾹꾹 눌러 담아 답장을 썼다,




시유와 나의 관계를 생각해보자면, 흔히 동화책에 나오는 사제지간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교생실습을 받을 때 꿈꿨던 그런 아름다운 사제지간의 모습.


아이들과 지지고 볶다 보면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시유하고는 너무 예쁘게만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아 가끔은 두려울 정도이다. 너무 견고한 이 아름다움이 깨어질까 두렵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로 스승과 제자가 이렇게 서로 다정하고 아름답게 상호작용할 수 있구나를 가르쳐준 아이다.


이 글을 쓰며 내가 생각보다 시유에 대해 더 좋게 생각하고 있구나를 느꼈고, 한 가지 다짐한 것은 혹시 언젠가 상황에 따라 이런 아름다운 관계에 금이 가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이들이란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이니 혹시 시유가 내게 조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줘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주자고 말이다.


어젯밤 헬스 끝나고 와서 피곤에 절어있었는데 시유의 메일을 보고 근육 세포 하나하나가 따스해지는 기분을 느껴서 글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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