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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희쌤 Jul 04. 2023

일기에 소설을 써낸 어린이

지금은 학교 현장에서 굉장히 많이 간소화(or 멸종)된 일기 문화.


나 때만 하더라도 학교에서 일기 쓰는 건 데일리 루틴이었다.


'방학 = 일기 숙제'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예나 지금이나 노는걸 너무너무 좋아하던 나는 방학 때 탱자탱자 놀다가 개학 하루 전 밀린 일기를 몰아 쓰는 데 달인이었다.


그림일기든 문장 일기든 다 드루와 드루와~


몇 시간 이 꽉 깨물고 집중하면 한 단치의 일기가 뚝딱이었다.


그 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2학년이었던 나(9세)는 여름방학 한 달치 일기를 몰아 쓰며 에피소드를 쥐어짜 내다가 순간 뇌 용량의 한계를 경험했다.


'헉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쓸거리가 생각 안 나 ㄷㄷ'


한 보름치 일기까지 쓰다가 순간적으로 소재가 고갈되자 당황했다.


'어떡하지... 여기서 일기를 멈출 순 없어. 당장 내일이 개학이라고!

그래! 당황하지 말자. 다시 멋지게 한 편 써 내려가보자.'


은행강도 이야기.


갑자기 은행강도 이야기가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씨익 웃으며 다시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엄마랑 국민은행에 갔다. 은행강도가 갑자기 유리창을 깨고 들어왔다. 강도는 방망이를 들고 여기저기를 다 깨부수고 다니며 돈을 훔쳤다. 엄마랑 나는 은행 의자 밑에 숨어있어서 겨우 살았다.'


그림칸에는 은행 유리창을 깨는 강도의 모습을 그렸다.


훗. OK.

멋져.


이 정도 에피소드라면 일기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자격이 충분하다 느껴졌다.


흡족한 마음으로 일기를 마무리하고 개학하자마자 1등으로 제출했다.


'호호호 선생님께서도 놀라시겠지?'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께서 그 소설을 읽으시며 얼마나 황당하고 웃기셨을까 싶지만, 당시 어렸던 나는 선생님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 이 극적인 사건을 적어낸 것에 대한 나름의 뿌듯함?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나를 불러 따로 꾸짖으시거나(왜 그짓말을 했어!라고 뭐라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지적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참 잘했어요' 도장을 큼지막하게 찍어주셨다.


아마 선생님께서는 거짓말에 방점을 두기 보단 아이가 어떻게든 숙제를 해내려고 한 마음에 더 집중해 주신 게 아닐까 싶다.


아마 그때 선생님께 혼났더라면 무언갈 어떻게 서든 마무리하려는 태도를 갖기보단, 여건이 되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는 태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아 못 썼네? 그냥 못 쓴 채로 내지 뭐'와 같은..)


이후 자연스럽게 커가면서 '아 그때 거짓말로 일기를 쓰면 안 됐었는데. 매일 성실하게 쓸 걸'이라며 내 행동의 과오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큰 그림을 그리며 기다려주신 선생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현재.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난 그때의 상상력을 십분 활용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상상력의 힘이 참 크다는 걸 자주 느끼고 있다. 상상력의 위력 bb)


일기에 소설 써낸 걸 보시고도 아이가 어떻게든 숙제를 해내려는 마음부터 헤아려주신 선생님께 이렇게 글로나마 인사드립니다. 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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