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기쁜 순간

행복한 순간만 기억에 남기기

by Eaglecs




무지개


무지개가 하늘에 걸려있는 순간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무지개가 하늘에 떠있는 시간은 짧으면 몇 분이고 운이 좋으면 두어 시간 정도라고 한다. 태양의 위치, 대기의 조건 그리고 대기가 품고 있는 미세한 물방울 크기와 밀도,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 무지개가 뜰 수 있다. 그런 여러 조건이 맞아야만 무지개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으니 무지개를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할 것이다.


쌍무지개.jpeg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쌍무지개. 실제로 촬영한 것도 있는데 찾질 못하여 네이버의 힘을 빌렸다)


최근에는 자주 무지개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예전엔 간혹 가다가 비가 온 후에 하늘에 분명하게 떠 있는 무지개를 본 적이 꽤 있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대기가 불안정하고 맑지 않기 때문에 무지개를 볼 기회가 계속 줄어 들고 있는 것같다. 따라서 아무래도 도시에서 삶을 살면 그런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기회가 적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기후 변화로 강수량이 변화하고 산업화에 따라서 대기 중의 오염물질이 크게 증가하면서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조건이 되기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공기도 맑고 유해 시설이나 공장이 적은 지방에서는 여전히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볼 때 느끼는 느낌은 무어라고 형언하기 어렵다. 다만, 그 순간 만큼은 가슴속에서 뭉클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떤 투명고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무지개는 내게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것도 내게 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통째로 내보이기만 할 뿐이지 않는가? 그렇게 온전히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는 밝은 무지개를 보는 순간은 그래서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나보다. 그리고 우리가 질리지 않게 자주 나타나지도 않으니 더 반가운 것 같다.




내 삶 속의 무지개


5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내 삶은 다양한 순간으로 채워져왔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쁜 순간, 슬픈 순간, 즐거운 순간 그리고 괴로운 순간으로 내 삶은 차곡차곡 채워져 왔다. 흔히들 슬프고 괴로운 순간은 잊고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만 생각하라고 하던데, 나 역시 내 삶의 모든 순간 중에서 가능하면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만 기억하고 싶다. 괴로움과 슬픈 순간은 굳이 회상하지 않아도 내 가슴속에서 떠나려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내가 의식적으로 다시 불러 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가끔씩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순간을 회상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하기 보다는 괴롭고 슬픈 생각을 좀 더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현재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미래에도 그런 상황을 겪을 두려움에서 지금 당장의 순간마저 그런 과거와 미래에 미리 사로잡혀 포박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속에서 만났던 기쁘고 행복한 순간만을 떠올려 보고 싶다. 내 삶 속의 무지개 같은 순간 말이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는 낯이 부끄럽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나는 내 삶 속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몇 개 회상해 보려고 한다. 딸바보인 아빠의 입장이라서 그런지 아무래도 딸아이가 태어났던 그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집과 가까운 동네 산부인과에서 1999년 12월 10일 아침 6시 30분경 태어난 나의 딸아이를 본 그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때는 내가 기쁘고 행복한 줄도 몰랐던 것 같다. 나중에 딸아이가 커가면서 진정으로 내가 행복하고 기뻤던 시간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인 1999년 12월 10일이 실질적으로 가장 기뻤어야 할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내 삶 속에서 가장 맑고 찬란한 무지개가 떴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는 자주 그 날 내가 당시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 안고 나온 핏덩어리 아기를 보는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아직 아빠가 될 준비가 덜 되어 있었던 나는 어떨떨한 느낌 뿐이었다. 기쁨 보다는 산모의 건강이 더 걱정이 되어 아내가 안전한지를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가장 기쁜 순간은 나랑 별 차이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의 진실로 기뻤던 순간도 사실 모두 아이와 관련된 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이건 지독한 내리사랑 때문이리라. 경쟁이 심해서 들여 보내기 어려운 유치원 입학 추첨에서 당첨이 되었을 때도 기뻤다. 좋은 환경에서 친구들도 만나고 훌륭한 선생님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치원 행사에 참여하여 아이와 함께 운동장을 뛰고, 뒷 동산에 올라갔던 순간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에게 이런 저런 요리를 나름 준비해서 해 주었는데 맛이 특별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먹는 모습을 볼 때도 기뻤다. 물론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게 순수한 기쁜 순간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아이'에 대한 기억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기쁨의 순간 그리고 신의 배려


이렇게 내가 삶 속에서 기쁨을 느낀 것은 거의 아이와 관련된 순간 뿐이다. 아내와 함께한 순간은 기쁨보다는 고마움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물론 고마움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도 있다. 이 글을 나중에 보면 섭섭해 할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과 아이에 대한 그것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니 말이다. 그건 아마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내가 겪은 기뻤던 순간은 거의 내 딸과 겪은 시간 속에서 느낀 것 뿐이다. 그러나 시험 성적을 잘 받아왔을 때 기뻤던 적도 없고(물론 잘 받아온 빈도가 낮긴 하다), 심지어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기쁘지는 않았다. 그건 고마움과 대견함이지 순수한 기쁨과는 다르다. 기쁨은 행복한 순간에서 느끼는 감정이고 고마움은 어떤 상황에 대한 감사의 감정으로 서로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내가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 보다 절대적으로 긴 시간을 보낸 곳은 내가 30년간 재직한 회사이다. 이건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입장일 것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보람을 느꼈고 즐거웠던 적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실 대부분은 필요와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삶을 소모한 것이지 진정으로 원했기 때문은 아니다. 따라서 그 시간 동안 순수한 기쁨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회사 생활이나 사회 생활이 나쁘고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도 반드시 우리의 삶에 필요하다. 온 세상이 다이아몬드나 황금으로 가득하다면 보석과 금덩이도 돌이나 흙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이 매우 희귀하기 때문에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내 삶의 기쁜 순간도 몇 개 없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 높고 빛이 나는 것이다. 온 삶이 기쁨으로만 가득차면 아마도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로 인하여 조기 사망에 이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쁨이 뭔지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기쁜 일이 너무 없다고 슬프고 아쉬워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매우 짧은 순간 동안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신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순간을 더 깊고 강한 기쁨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 반대로 우리 삶에는 왜 그리도 어려움과 고난이 많은지 이해가 될 것 같다. 잦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면 내성이 생길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이 또한 우리가 삶 속에서 언제 겪을지 모를 풍파에 당당히 대응하게 하는 질기고 강한 맷집을 길러주기 위한 따뜻한 신의 배려가 맞을 것 같다.


혹시 당신은 이미 신의 배려를 너무 많이 받았는가? 그렇다면 그건 아무래도 신이 당신을 너무 많이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꽤 적지 않은 신의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도 꽤 큰 배려를 받았다. 아무튼 나는 신의 친절한 배려 덕분에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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