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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Aug 01. 2024

사유(思惟) 하는 삶

가을 이야기 - 둘

 노예는 2가지로 구분된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예속된 진정한 100% 노예가 있고, 비록 육체는 일정 부분 예속되어 있지만 '정신'은 자유로운 '반자유인'이 그들이다. 나는 반자유인이라는 표현으로 노예라는 불쾌한 용어를 대신하고 싶다. 그리고 반자유인은 적어도 일정 부분은 스스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려는 주체적인 사람일 것이다.


 우리에게 사유의 자유가 있음을 분명히 상기할 때에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일상 생활에서나 직장에서나 스스로 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 행동하고, 고용주의 지시대로 따르는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사람'인 '철학적 삶의 관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또 하나는 사유에 따른 주체적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思惟의 自由


  인간에게는 사유(思惟)의 자유가 있다. 思惟는 인간이 이성에 따라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개념, 판단, 추리 등과 같이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는 것을 사유라고 칭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사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그에 기초하여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물론 그런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기본적으로 부여받은 사유의 자유는 인간으로부터 강제로 박탈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취약한 점이 있기도 한데, 바로 인간에게는 사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철학자가 될 수는 없어도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다. 철학은 인간의 삶과 존재, 도덕, 사회, 지식 등과 같은 개념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인데, 사실 이런 주제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일정 부분 철학자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A)은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B)이다. 

나(C)는 사람(A)이다. 

따라서 나(C)는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B)이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 따르면 나도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글을 통하여 확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피터 드러커나 톰 피터스와 같은 유명한 학자와 거의 비슷한 반열에 있다고 알려진 경영 관련 학자이자 사상가인 찰스 핸디의 책 '포트폴리오 인생'에 '사유하는 기업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유하는 기업인이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일상 생활에서나 직장에서나 스스로 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 행동하고, 고용주의 지시대로 따르는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그는 '철학자 겸 관리자 philosopher-manager'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는 '기업인'을 언급했지만, 결국 기업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개별 직장인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이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주장인 '사유하는 철학적 관리자'에 대하여 찰스 핸디가 던진 몇 가지 질문을 통하여 살펴 보려고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질문을 던졌나? 


 내게는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말고 의문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내 경우에는 내가 몸 담았던 세상(직장)에 질문은 던졌었지만 모든 질문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답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주어진 조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인 것 같다. 특히 특정 조직에 속하게 되면 그 조직의 문화, 분위기 그리고 암묵적 룰에 복종하여 자신의 주체적 판단이나 사고활동을 멈추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조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런 '주체적 사고의 멈춤'은 생존하기 위한 자연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정 부분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체적인 행동을 할 때 마다 조직에서는 외로워질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나의 주체적 행동이 옳지 않거나 정도를 넘었을 수도 있고, 나의 주체적 행동을 수용하지 못하는 조직내의 타인들의 행동이나 사고가 바르지 못했었을 수도 있다. 사실 아무리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정도 혹은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형태로 하기는 어렵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개성이 강조된 '주체적 행동'은 일반적으로 기존 질서에 대하여 수용적이거나 복종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직은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체적 행동을 하는 개인은 폐쇄적이고 기존 질서에 강하게 매여있는 조직 속에서 극도로 외로워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이유로 보통의 조직인들은 수용적이 되고 복종적인 태도에 서서히 익숙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세월이 흐르면 그는 더 이상 본인이 주체적으로 살 권리와 자유가 있음을 잊게 되고 만다. 그 과정 중에서 불현듯 각성하는 사람들은 세상(조직)의 틀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게되는데 그 수는 결코 많지 않다. 세상 혹은 조직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구속력은 개인에게 너무도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좀 수비적인 관점이긴 한데, 세상(조직)에 질문을 던지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반드시 답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세상에 질문을 던질 때는 '질문을 받는 자'들의 '입장'도 생각하는 '일정 수준의 통제된 주체적 행동'이 현실적일 것이다. 물론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자신이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수용할 수 있다면 마음껏 질문을 던질 것을 권한다. 사실 세상은 넓고 당신의 질문에 답할 곳(다른 조직 그리고 다른 회사)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스스로 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서 살아가는가? 


  난 내가 내가 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서 살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많은 면에서 그렇지가 않았음을 절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 혹은 어느 곳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이상 내 시간과 행위의 대부분은 나를 중심으로 사용되고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스스로 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서 삶을 살려면 나 스스로를 온전히 모든 면에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완벽하게 홀로 설 수 있을 때에만 나는 나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다. 혹은 경제적인 면을 모두 내려 놓고 무소유의 삶을 추구한다면 역시 비교적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전형적인 무소유의 삶을 사신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이후로 어쩌면 그런 분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타인의 의지대로 살기 위하여 나의 의지를 타인의 주파수에 맞추고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너무 과장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로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자신이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에 대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 그렇게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오해' 속에서 삶을 채워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원하는 직장을 얻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실망하고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이기도 하고 혹은 모든 예속에서 단지 벗어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각자의 관점과 상황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행복, 안녕, 사랑, 성취, 의미있는 관계 정립, 건강 그리고 안정 등을 삶 속에서 이루기를 원할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지식욕이 있는 사람도 있고, 자아 실현을 추구하며 모든 활동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결국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삶이란 스스로 정한 우선 순위에 따른 삶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을 내가 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내 삶의 우선 순위는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나만의 '思惟 작업'의 선행이 필요할 것 같다. 




지시에 따르는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사람인가? 


  현대인 중에서 자기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놓고 '난 노예다!'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직장에 코가 꿰서 옴짝달싹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은 노예와 다를바 없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나도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동안은 일종의 노예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관점일 수도 있지만 회사의 소유주 이외의 '모든 급여를 받는 사람'은 일종의 계약에 따라서 노동을 제공하는 노예다. 권한이 더 많은 노예, 급여가 좀 더 높은 노예, 처우가 좋지 않은 노예, 등 서로 권한과 보상 측면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모두 노예가 맞다. 


 노예라는 단어는 의미상 '다른 사람 혹은 권력에 소유되어 강제적으로 일을 하거나 복종을 해야만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 혹은 권력의 소유물로 취급이 되고, 따라서 자유 그리고 다양한 권리가 박탈된다. 실제로 노예제도는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지기는 했지만 형태만 달라졌을 뿐 어느 나라에나 속성상 '노예'인 사람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한 마디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고,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명령과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노예가 아닐 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에서 노예는 2가지로 구분된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예속된 진정한 100% 노예가 있고, 비록 육체는 일정 부분 예속되어 있지만 '정신'은 자유로운 '반자유인'이 그들이다. 나는 반자유인이라는 표현으로 노예라는 불쾌한 용어를 대신하고 싶다. 그리고 반자유인은 적어도 일정 부분은 스스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려는 주체적인 사람일 것이다.





 찰스 핸디의 세 가지 질문은 결국 모두 '주체적 삶의 방식'에 대한 말이다. 문장만 달리했지 모두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사유(思惟)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 받은 사유의 자유는 강제로 박탈될 수 없다. 다만, 남이 박탈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사유의 자유가 있음을 망각하고 사유 활동을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사유의 자유가 있음을 분명히 상기할 때에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일상 생활에서나 직장에서나 스스로 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 행동하고, 고용주의 지시대로 따르는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사람'인 '철학적 삶의 관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또 하나는 사유에 따른 주체적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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