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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Aug 01. 2024

여름속의 가을

가을 이야기 - 하나


 모든 열매가 땅을 향해서 매달려 있는 것은 어쩌면 그 열매들이 초심을 잃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물론 중력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지만 의미를 굳이 부여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겸손함은 고개를 숙이게 만들지 않는가? 그런데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오만하게 상대를 위압적으로 대하는 것은 겸손함이 부족해서 이겠지만 어쩌면 머리가 텅비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입추, 처서 그리고 백로


 곧 입추(立秋)다. 2024년 입추는 8월 7일이다. 오늘이 7월 8일이니 꼭 1개월이 남았다. 이제 겨우 여름의 입구인데 벌써 입추를 말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한 달이면 금방이다. 시간은 마치 누구에게 쫓기는 것처럼 그저 앞으로 쌩하고 내 달리기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초복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여름이 한창이다. 일주일 후인 7월 15일이 초복이고 그 열흘 후인 25일은 중복이다. 그리고 8월 7일 입추가 지나고 일주일이 더 지난 후인 8월 14일이 말복이다. 따라서 8월 7일이 절기상으로는 아무리 입추라고 해도 뜨겁고 습한 여름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을 것이다. 한 여름의 무더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복날이긴 하지만 초복, 중복, 말복은 24절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간혹 딱딱한 행사장에서나 들을 법한 말인 '입추의 여지가 없다'라는 표현에 들어간 입추는 立秋가 아니라 立錐이다. 립에 송곳 추로 끝이 날카롭고 매우 좁은 송곳마저 세울 곳이 없을 정도로 빽빽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찬 것을 의미한다. 비록 같은 발음이지만 立秋는 여전히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지만 立錐는 이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같다. 24절기의 13번째 절기인 立秋는 立錐처럼 死語가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절기상으로 가을을 본격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절기는 처서(處暑)이다. 단어 속에는 가을을 의미하는 秋가 들어가지만 그래봐야 무더위의 한 복판에 있는 立秋와는 달리 처서는 확실히 가을이 코앞에 왔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온이 낮아지기 시작하는 때이다. 처서(處暑)라는 말 자체가 '더위를 처분한다'가 아닌가? 처서의 이름만 들어도 더위가 움찔 할지도 모르겠다. 더위를 처리해 버리겠다는 표현에서부터 닭살이 돋는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금년 처서는 8월 22일이다. 지역별로 다르겠지만 아마도 이쯤 되면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의 새벽에는 습하고 더운 기운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9월 7일 백로(白露)가 될 때까지 매일 조금씩 기온이 변하면서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백로(白露), 즉 새벽 흰이슬이 맺히면서 완벽하게 더위를 물러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지쳐서인지 입추와 처서는 그냥 건너뛰고 바로 백로가 왔으면 하는 생각이 날 정도이다. 




계절 속의 계절


 간밤에 비가 꽤 내렸다. 아직 한창 여름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름비다. 그러나 밤새 내린 비로 대기가 습해졌지만 동시에 전반적으로 기온을 조금은 떨어뜨려서인지 새벽에 열린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공기는 제법 선선했다. 요즘은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꽤 덥기 때문에 방충망 사이를 비집고 침범하는 아주 작은 날벌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감수하고 창을 열고 잠을 청하고 있다. 그런데 돌연 오늘 새벽에 열린 창을 통해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가을의 기운이 아주 미세하게 느껴졌다. 아직은 전혀 가을의 그림자 조차 볼 수 없는 완연한 여름이지만 이미 절기의 순환에 따라서 가을은 비록 우리가 눈과 피부로 느낄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쪽으로 출발하여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계절은 달력에 표기된 절기에 따라서 매해 어김없이 오고 간다. 그리고 이번 해도 역시 동일하게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 기운을 아주 잠시 때이르게 느꼈던 것 같다. 봄 속에 여름이 있고 여름 속에 가을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가을 속에는 겨울의 씨앗이 들어 있고 다시 겨울이 되면 그 겨울의 심중 어딘가에는 봄의 싹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한 계절 속에 다음 계절의 씨앗이 없이는 다음 계절이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변함없는 순환이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의 순환이다. 그리고 세상속의 모든 생명들이 계속 존재하게 하려면 이런 순환의 씨앗은 반드시 필요하다. 멈춤은 곧 죽음이기 때문에 자연은 이렇게 부지런하게 세상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름의 한 복판에 위치한 입추(立秋)라는 절기는 그래서 가을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씨앗이 처서와 백로라는 가지와 잎으로 퍼져서 결국 가을이라는 열매로 자라나는 것이리라.  




씨앗 속의 씨앗


 이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도 작은 씨앗 속에 큰 열매가 이미 들어가 있다. 형태만 열매가 아닐 뿐 큰 열매의 모든 형질은 그 씨앗 속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씨앗이 큰 열매로 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그 열매 속에는 작은 씨앗이 자리하게 된다. 씨앗이 열매를 맺었는데 그 열매 속에 다시 씨앗이 들어 있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반복이다. 계절이 끝없이 순환하듯이 생명도 이렇게 끝없이 반복을 거듭한다. 우리는 씨앗을 작은 알갱이로만 보지 말고 그것을 통하여 열매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씨앗이 자라서 가지와 잎을 만들고 결국에 큰 열매를 맺었다고 하여 그 열매속 씨앗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된다. 즉 초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약 아직 미미한 존재, 약한 사회적 위치, 아무것도 아닌 사람 혹은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어쩌면 지금 씨앗의 상태에서 발아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 작업 말이다. 뭔가 잘 되고 있지 않더라도 포기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씨앗은 금방 싹을 틔우지 않는다. 충분한 혹은 최소한의 양분을 받고 오랜 기다림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서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리고 틔운 싹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 뭔가 안되고 있다면 어쩌면 너무 성급하게 결과를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에 어떤식으로든 브레이크가 걸린 것 같으면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분야에 정통한 사람,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 뭐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 혹은 많이 가진 사람도 처음에는 그가 무엇을 이루었건 간에 씨앗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음을 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게 크게 성장하여 실한 열매를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특히 사회적 지위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지원과 도움을 통하여 그 자리에 올라간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고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 자리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 회사의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 때 직원들이 그에게 머리숙여서 인사하는 것은 사장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것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직위에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그 인사와 존경의 표시가 자신을 향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순진하게 오해하고 어느새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지도 않은 카리스마를 내보이려고까지 한다. 바로 순간에 그의 오만함은 좀비처럼 죽지도 않고 계속 땅을 비집고 머리를 밖으로 들이 미는 논밭의 잡초같이 제거의 대상이 뿐이다.   


 모든 열매가 땅을 향해서 매달려 있는 것은 어쩌면 그 열매들이 초심을 잃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물론 중력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지만 의미를 굳이 부여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겸손함은 고개를 숙이게 만들지 않는가? 그런데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오만하게 상대를 위압적으로 대하는 것은 겸손함이 부족해서겠지만 어쩌면 머리가 텅비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속이빈 쭉정이 벼가 고개를 숙일 수 없듯이 말이다.


 자연의 순환은 엄정하고 예외가 없다. 매정할 정도로 뒤를 돌아다 보지 않고 변화를 거듭한다. 자연은 영원한 변화를 매 순간 내보이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무엇이든지 늘 변한다는 것을 말이다. 자연은 이렇게 변화의 불가피성을 통하여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그 어떤 위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겸손을 잃지 말라는 것을 말이다. 


 가을은 오늘 새벽에 저 멀리서 자신의 그림자의 백억분의 일을 내게 보이면서 곧 오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비록 지금은 더위의 한 복판이지만 그 가운데에 가을의 씨앗은 이미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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