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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Eleutheria.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라. 당신을 그럴 능력이 있다

by Eaglecs

최초작성 2021. 4. 23. 9:12 / 2024. 04.10 보완

이 글은 특히 복잡하고 꼬였다. 문장이 지루하고 헷갈린다. 최대한 명확히 나의 생각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이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서 추상적 표현이 난무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주제이든지 간명하게 표현하자고 그렇게 떠들었는데, 이렇게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부끄럽지만 나의 수준이다.


공부를 못하면 선생님께 맞으면 되고(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말도 안된다) 돈이 없으면 싼 것 먹으면 된다. 역시 나의 수준이 이 정도이면 이 정도에 스스로 만족하고 최대한 가능한 선에서 노력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 그래서 질책이 쓰겠지만 감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부디 이 복잡하고 지루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의 넓은 아량과 이해를 부탁드린다.



나는 지금 전라도 광주에 머물고 있다. 월요일인 2021년 4월 19일 새벽 4시 20분쯤 인천 집을 출발하여 7시 54분경에 전라도 광주에 있는 회사 기숙사 주차장에 도착했고 지금까지 5일째 광주에 머물고 있다. 머문다는 표현은 자의적인 의미도 되고 타의적인 의미도 되는 약간 중의적 단어이다. 내 경우엔 머묾을 당하고 있는 편에 속한다.


나는 송도와 부평 그리고 광주 사업장에 있는 약 200여명의 인원을 총괄하고 있고, 그중 광주의 중요성이 크다. 그런데 최근 광주 팀의 관리자가 젊은 인원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조직의 책임자인 내가 여기에 머물면서 조언해 주면서 조직 안정을 조기에 이룰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아울러 현장 가동률을 올리기 위한 물량 확보를 위한 노력을 바로 그 현장에서 해야 한다는 내 "보스"의 "의견"에 따라서 나는 2일 일정으로 왔다가 5일째 머묾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내용 이외에 다른 목적과 배경도 있는데 그것은 생략한다. 어찌 되었든 내가 이곳에 몸을 담고 있고, 이곳을 내 경제적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장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내 입장에서는 지침대로 머물 수 밖에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달갑지 않은 선택이지만, 그런 나름의 불가피성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달갑지 않고 어려운 환경이라도 어떤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일지에 대한 판단의 자유는 나 이외에 그 누구도 박탈은 불가능하다. 개인이 그런 자유의 존재 여부를 인지하지 못하여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그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 이상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잠시 머묾을 당한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유로울지 말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일 것이다.


Eleutheria 라는 말이 있다. 독일 작가 울리히 슈나벨의 책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말인데, 자유, 정확히 말하면 의지의 자유라는 말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Liberty가 아니라 Freedom이다. 사외나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Liberty와는 결이 다른 의지의 자유이다. 단어가 그리고 그 뜻이 매우 마음에 든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느껴서 받아 들일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의지의 자유이다. 내가 머묾을 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할 수 있고 그 생각에 따라서 최소한의 행동을 할 수 있다면 비록 머묾을 당하고 있더라도 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나를 여기에 가둬 놓고 속박하고 얽매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한 지침을 내린 사람의 현실이 그럴 수 밖에 없었고 그 현실 속에서 그는 그것이 나와 그 자신 그리고 내 조직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내린 그로써는 합리적인 결정일 뿐이다. 그게 당시의 현실이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난 물리적으로 이곳 전라도 광주에 5일째 갇히게 된 것은 맞다. 그러면 그래서 겪은 불편이나 손해가 무엇인가 살펴보자.


일단 내 자유가 속박되었다는 약간의 언짢음 정도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잠자리인데, 사실 기숙사가 조금은 불편하기는 하지만 잠자리는 집이나 여기나 거기서 거기다. 최근 즐겨 듣는 음악을 좋은 음질로 감상하지 못하는 점이 좀 아쉽지만 그렇다고 하여 매우 슬프거나 비참함을 느낄 정도로 음악 애호가는 아니기 때문에 딱히 이 또한 큰 피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예상보다 길어진 출장으로 옷을 자주 갈아입지 못하여 청결 측면에서 좀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악취가 날 정도도 아니고 다행히 평소와도 별 차이 없기 때문에 이 또한 큰 피해는 없다. 집에서 머물 수 없으니 아내와 떨어져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는데 이건 과연 불편인지 혜택인지 그 경계가 애매하다. 평소에도 그렇게 애정 행각을 시도 때도 없이 부리는 닭살 부부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을 문제 삼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집에 있어서 좋은 것이 무엇일까? 익숙한 것들에 대한 편한 접근성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조금 더 좋은 품질로 듣는 것, 와인을 즐기고 싶을 때 만끽 할 수 있는 것, 소소하게 더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이다. 따라서 내가 광주에 머묾을 당하기는 했지만 딱히 내게 크게 불편을 끼치거나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주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있다. 그 결정을 내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문제이다. 내 결정권을 침해당했다는 것. 이것이 유일한 불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물론 조직이기 때문에 위계와 절차에 따라서 일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런 근원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처한 현실이 그랬다는 점에 대한 스스로의 내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일종의 불편으로 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결정하여 내가 머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사실 내가 스스로 결정하여 뭔가 해도 간혹 불만스러울 때가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내가 결정해서 했다면 최소한 누구를 원망할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에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자주적으로 뭔가 결정하면 불만이 없어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불평하면 결국 자신의 판단 착오라고 인정하고 제 발등을 찍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 결정을 내가 하지 못하고 상급자의 결정에 따라서 행해야만 하는 것이 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결정하지 못하여 느끼게되는 이러한 불편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것을 불편하지 않게 느끼는 것을 선택하면 이런 불만족조차 없었을 것이다. 오늘 글의 핵심문장이다. 내가 자유 의지에 따라서, 머묾을 당한 선택에 대하여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기로 선택했다면 아마 오늘의 이 글도 쓰지 않았으리라.


‘불편하지 않게 느끼는 것을 선택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반응을 내가 선택한다는 것이다. 슬픈 상황이 벌어졌지만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견디고 극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게 자신의 반응(감정적)을 선택한 것의 예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화가 나지만 일단 참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참을 수도 있다. 역시 스스로 자신의 반응을 선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불편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그게 불편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 할 수 있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딱히 어떻게 더 설명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자신의 감정 반응, 즉, 어떤 상황을 인식하고 나서 느껴지는 반응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통제하는 것이 요점이겠다. 이게 되나 싶지만, 자기 스스로 과거를 돌이켜 보면 분명히 이런적이 있었다. 좀 쉽게 이야기해서 모든 사람은 어떤 상황(맘에 들지 않거나 들거나 모두)에서 감정을 억제하거나 숨긴적이 있을 것이다. 이게 자신의 반응을 선택한 것 바로 그것이다. 이미 그렇게 해왔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체 감정 콘트롤 메커니즘이다.


인간은 아니 모든 동물은 자유를 갈망한다. 식물도 자기가 원하는 것, 즉 자유를 갈망한다. 그래서 풀들과 꽃들이 태양 빛을 향하여 고개를 틀지 않는가? 지렁이도 비가 오면 그 기운을 느끼고 땅을 헤집고 나와서 시원한 비를 한바탕 즐긴다. 그 이후 상당수의 지렁이들이 자동차 바퀴에 깔려서 산산조각이 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자유롭게, 혹은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을 했을 경우 거기에는 역시 책임이 따른다. 내 의지대로 선택하였으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지렁이는 산산조각이 났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서 인간의 손에 의하여 목이 잘린다. 인간도 자유의지를 통하여 삶을 이어 나가다 결국은 그에 대한 결과값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게 주체적 책임이다.

의지의 자유, 자유 의지, Eleutheria, 아주 아름답고 고귀한 단어이다. 그 뒤에 자연 발생적으로 따라오는 '책임'의 존재에 대하여만 잊지 않으면 의지의 자유를 좀 더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내가 그 선택을 내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의 자유를 약간 제한하고 '내려온 지침'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바로 수용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바꿀 수 없으면 받아 들이면 그 뿐이다. 이게 덜 에너지 소모적이다. 즉 경제적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그런다 한들 딱히 나쁠 것도 없었지 않은가?



요약과 감상 :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겪게 된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받아 들이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할 권한과 능력이 있음을 잊지 말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을 잊고 마구 날뛰는 좁은 자아의 감정 소용돌이에 휘말려 쓸려 내려가곤 한다.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한 반응을 선택하라. 상황에 지배되지 않으면 내가 주체적으로 반응을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따라서 그 상황에 따라서 초래될 다양한 가능성의 결과값 중에서 가장 유리한 결과값을 얻어낼 수 있다. 단, 이런 주체적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 다는 것을 잊지 말라.


도대체 그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하냐라는 볼멘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맞다. 어렵다. 그래서 감정을 통제하면서 평온함 혹은 중용을 유지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권한과 능력을 인지하고 활용할 수는 없다. 그중 그걸 자각한 사람이 그 능력을 활용하기로 선택하고 어떤 상황에서 평온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소수'가 된다. 그 '소수'가 되기를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역시 또 선택이다. 우리 자유 의지에 따라서 그 '소수'가 되기를 '선택' 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복잡한 문장 구성과 일면 궤변으로 점철된 내용에 대하여 사과는 하지 않겠다. 서두에서 이미 깊게 허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독자님들의 이해를 바란다. 이 작가를 이해하는 선택을 해 주시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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