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올바른 인식과 관찰의 대상이다.
최초작성 2017. 10. 24. 8:41 / 2024. 04. 11. 보완 작성
들어가는 말,
이번 주제도 재미가 없는 영역에 속할 것이다. 듣기만 해도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스트레스가 제목이니 말이다. 우리는 이걸 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과연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아가면 좀 더 그것을 이해하고 대항하거나 수용할 여지가 커지지 않을까?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말을 섞기도 싫고,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평범한 나와 비슷한 류의 사람이었고 평판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들 한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있다. 아무튼 그렇다고 그가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이젠 우연히 곁을 지나치게 되어 그 모습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듣게 되어도 그냥 또 하나의 사람, 나랑 같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람으로 인식이 되지 꼴 보기 싫다, 정말 싫다, 나쁜 사람이다, 라는 올바르지 않은 앎에서 초래된 감정과 인상에만 전적으로 지배되지 않을 수 있다.
스트레스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그게 뭔지 소문에 이끌려서 두려워하거나 어려워만 말고 알아보고 싶었다. 여러분들도 같은 고민이 있을 수 있는데 이 기회에 한번 고개를 돌려서 다른 시각으로 보면 어떨까? 안타깝지만 이 지루한 글을 통해서 말이다. 내 글의 지루함에도 스트레스 받지 마시길 바란다.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늘 일과 관련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 강도의 세기가 다를 뿐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미꾸라지를 실어 나르는 트럭에 메기가 들어가면 미꾸라지들이 장시간의 운송 도중에 죽지 않고 오히려 생생하게 팔딱거릴 정도로 힘이 넘친다고 한다. 메기의 위험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느끼고 그에 대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리라. 미꾸라지는 본능적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운송 내내 메기의 동태를 살피면서 몸에서 힘을 빼지 않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 강도가 미꾸라지에게 적합한지 과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꾸라지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미꾸라지의 신선도를 높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적정하며 유익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판매자의 스트레스가 아니기도 하고.
물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이름을 걸고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사업을 하는 사업가가 받는 스트레스 레벨은 직장인의 그것과 차원이 다를 수도 있다. 난 직장인이고 사업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의 대부분을 투자한 사업가라고 가정하고 생각해 보면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즉시 상상되는 것을 보면 일단 직장인이 받는 스트레스와는 결이 다를 것이고 수준도 높을 것 같다.
특히 대기업처럼 흥망이 쉽지 않고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경우라면 회사의 존립이 쉽사리 영향받지는 않으므로 그런 기업의 소유주는 스트레스 레벨이 좀 다를 것 같은데(높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 반면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소기업의 경우라면 그 소유주가 받는 스트레스 수준이 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규모가 더 낮아져서 5인 이하의 사업장 그리고 그보다 더 축소된 1인 기업을 운용하는 사람의 스트레스는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직장인이든, 개인사업자든, 중소기업 오너이든, 대기업 오너이든 모두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는 단어의 의미로 보면 ‘압박’ 혹은 ‘긴장’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데 그 존재를 뭔가가 내 의지에 반하여 누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의 정신과 육체를 굳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약 180CM의 키인데, 위에서 뭔가가 나를 눌러서 170CM로 찌부러뜨리면 난 무릎을 살짝 굽히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흡수하게 된다. 특정 공간에 갖혀서 상하좌우로의 이동이 불가한 상태에서 눌림을 당한다는 가정이다. 다시 그 압박이 증가하여 100CM까지 날 찌부러뜨리면 난 완전히 주저앉을 도리 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이 때는 허리의 통증, 압력을 전달하는 직접적인 힘이 미치는 내 정수리의 고통 그리고 온 체중과 압력을 견디고 있는 목, 발목과 발바닥 등 온 몸 여기 저기에 고통이 스며 들 것이다. 다시 80CM까지 압력이 더 내려온다고 가정해 보자. 내 키를 고려할 때 내가 주저 앉아서 최저로 만들 수 있는 높이가 아마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줄어 들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받는 고통의 크기는 순간적으로 인내의 한도를 벗어나 버리고 난 몸부림치거나 혹은 혼절을 해 버리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온 몸이 고통이 퍼지는 그 느낌은 끔찍하다.
육체를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형식으로 스트레스를 표현했지만 모든 스트레스는 그 작동 방식이 위와 같다고 생각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떤 임계치를 넘어서면 정신과 마음 혹은 그것을 담고 있는 깊은 가슴 속에서 더 견딜 수 없음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어떨 때에는 깊은 울음으로 혹은 날카로운 비명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리 없이 고통을 감내하며 울분과 고통을 삭이다가 몸 속에 육체적 변형을 일으켜서 병이 들기도 한다. 모두 스트레스라고 이름 지어진 외부로부터의 압력의 작용이다.
이러한 압력도 역시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에 적응할 수 있다. 따라서 스트레스는 거스를 대상이 아니라 적응할 대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위와 같이 뭔가가 무엇을 누르면 그 무엇은 그 힘 혹은 그로인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육체적, 물리적 압력은 그에 따른 몸의 변형을 즉시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압력을 받는 대상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정신적 압력은 그 압력을 받는 대상이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서 그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적게 받거나 아예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는 이 압력과 우리 사이에는 우리의 생각 혹은 의식이라는 무한대의 완충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줘도 그것을 훌륭하게 받아낸다면 그 스트레스는 허공에서 사라져 버리고 기능과 영향력을 완벽히 상실하게 된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 말이다. 물론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스트레스를 피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러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압력을 쉽게 피하지는 못한다. 일부 선택된 사람들이 그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데, 그 선택된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통계를 내 보지는 않았지만 내 경험치에 따른 어림짐작으로 말하면 약 10% 미만의 직장인이 그런 선택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근거는 없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기억을 되돌려서 내 주변 지인들 10명 정도를 떠올리면 그중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 혹은 회복력이 높은 사람은 1명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10%라고 추정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표현을 '선택을 받았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은 수 많은 스트레스 테스트를 견디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내공의 달인이 아닌가 한다. 화살이나 총알보다 때로 강한 것이 말로 표현된 언어의 힘이다. 주로 정신적 스트레스는 물리적 환경에 근거하여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비난, 힐책, 폭언, 힐난, 비웃음, 조롱, 모멸감, 무시 등 등의 다양한 형태로 언어라는 매개 수단을 통하여 정신적 스트레스는 우리들에게 전달되어 온다. 이런 언어적 스트레스 말고도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발생되는 스트레스 또한 많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던지, 일을 완전히 망쳤다던지,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최악을 선택하여 결과가 좋지 않았다던지, 등 등 다양한 상황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전달한다.
이린 것들을 성공적으로 받아내고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인데, 그게 대단히 도전적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모든 사람이 훌륭하게 그런 스트레스 공격을 견뎌낼 수 있다면 아마도 또 다른 형태의 스트레스가 만들어질 것이다. 스트레스 유발자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빼앗긴 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스트레스 요인은 끈질김을 갖고 있다. 집요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자연에 속한 생명이다. 자연의 직접적인 영향을 24시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야 한다. 아마 죽어서도 어떤 형태로든 압력은 존재할 것 같다. 따라서 스트레스는 피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트레스는 그냥 삶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다. 스트레스 없는 세상은 아마 재미도 많이 덜 할 것이다. 어떤 형태의 긴장이나 압력이 없다면 스포츠도 재미 없고, 일도 재미 없고, 영화도 재미 없고, 밥 먹는 것도 재미 없을 것이다. 이렇게 스트레스는 우리 삶을 이루는 수만 가지의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음식과도 같다. 맛난 음식이라도 많이 먹으면 탈이 나고 살이 쪄서 몸의 움직임을 둔하게 하듯이 스트레스도 음식처럼 절제하며 받아 들여야 하겠다. 많이 받으면 탈이 나며, 전혀 받지 않으면 생의 활기가 없어진다. 그야말로 필요 악이면서 동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려면 그 스트레스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그 스트레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어떤 거대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런 상황으로는 어떤 상황이 있을까?
자, 우리 집이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고 해보자. 실로 엄청난 일이다. 수 십 년을 살아오면서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재난이다. 수많은 가재도구, 옷, 가구, 내가 좋아하는 전자제품, 책, 문서, 등 등 실로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다양한 품목들이 불과 함께 공중으로 사라졌다고 가정해 보자. 일단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고 나로선 막대한 비용 손실이 일어나서 큰 부담이 될 것이고, 당장 잘 곳이 없어지고 입을 옷도 없어져서 난감 그 자체일 것이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적절한 한 예가 아닐까 한다.
그럼 이 상황에서는 그냥 슬퍼하고 화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반응한다고 해서 없어진 가구나 옷이 재생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내 눈 앞에서 없어져 버린 현실에는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집착은 하는 순간부터 내 인생에 마이너스가 된다. 나와 내 가족에 플러스가 되는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집이 다 타버렸는데? 그래도 방법은 있다. 살 길도 있다. 집과 가재 도구, 등 물질적인 것들이 모조리 없어졌으니 새로 시작하기에 완벽한 조건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억지스럽다. 하지만 냉철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에 완벽한 조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매우 명확한 사실일 뿐이다. 따라서 어떻게 다시 시작할 지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서 하나 하나 만들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질없는 후회나 아쉬움으로 슬퍼하면서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물건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
잘 생각해 보니 가재 도구를 비용으로 환산해 봐야 수천 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 옷도 대부분 질렸다. 가전 제품들은 안 그래도 싹 바꾸고 싶었다. 사실 집도 오래되어 맘에 안 들었다. 어차피 임차인 이기 때문에 내 집도 아니다. 보증금을 돌려 받으면 그 뿐이다. 다행이 그 동안 저축해 놓은 돈이 많지는 않지만 새로이 가구를 사고 가전 제품도 사고 옷도 살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책도 너무 편중된 시각에서 읽어 왔는데 이번 기회에 시야를 더 넓혀서 새로운 영역을 공부해 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아니 자리만 많이 차지하니 이젠 전자책을 봐야겠다. 집은 새로 얻으면 된다. 게다가 새집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하기 위하여는 시간과 노력과 그래도 적다고만은 할 수 없는 돈이 필요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하거나 나를 낙담시킬 정도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불에 타버린 집을 바라보고 울부짖을 시간에,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었을 미래를 상상하며 미소를 짓는 편이 천 배는 좋을 것이다. 발명가 에디슨이 자신의 연구소 대부분이 사고로 불타서 없어져 버린 현장을 멀리서 바라볼 때 한 말이 ‘그래도 저 붉은 불 빛은 아름답지 않은가?’ 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직원들은 우왕좌왕하면서 당황하는데 정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하기에는 쉽지 않은 말이다. 에디슨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다시 시작하여 새로운 발명을 이어갔을 것이다. 아무나 이를 수 없는 경지의 멘탈 관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집이 불에 타서 다 없어져 버린 것만큼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차 스트레스를 통제할 수 있다. 물론 매우 어렵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통제하는 방법은 위에 기술해 놨듯이 억지가 아니라 단지 분명한 사실이다. 생각 혹은 의식 이라는 무한의 완충장치를 활용하여 본질을 보고 최악의 상황 속에 함몰되지만 말고 이제 끝이 났으니 새로운 시작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이다. 이런식의 접근이 합리적인 판단이고 생각이지만 누구나 손쉽게 할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이 방법이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대응 방식임에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심박을 올려서 가슴을 데울 것이 아니라 우리는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것, 즉 새로운 시작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무튼 위 '화재 사건'에 대하여 각 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서 물론 어려울 수도 있지만, 통상 수 천 만원이면 새로운 터전에서 최소한의 삶을 시작을 할 수는 있기 때문에 집의 전소라는 ‘큰’ 사건도 내게 스트레스를 주기엔 역부족인 하나의 사실이 될 뿐인 것이다. 이 금액 수준에 대하여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아파트 값이 얼마인데, 라는 의견이 많겠지만, 주거 형태는 그것 말고도 많다. 뭔가 포기하면 낮은 금액으로 내 삶을 살아낼 곳을 찾을 수 있다. 과도한 긍정이나 낙관에 빠진 인식의 오류라고 하기엔 위와 같은 대처가 지극히 객관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냉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본질이 보인다.
우리는 스트레스와 함께 살다가 함께 죽는다. 만약 죽고 나서도 육체에 일말의 감각이 남아 있다면 화장장에서 만나게 되는 강력한 화염의 압력에 노출될 것이고, 땅속에 묻일 경우엔 둔중한 소리와 함께 관 뚜껑이 닫히면서 세상과의 단절로부터 격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스트레스는 따라서 우리 삶이고 우리의 죽음까지 따라온다. 삶의 일부분이고 필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매번 경험할 때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냉철한 시각으로 맞닥뜨려야만 할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나를 위하여 구성되는 다양한 삶의 요소중의 하나일 뿐인 스트레스라는 현상에 그렇게 억눌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럴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온 몸을 뒤틀어가며 생각을 해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기도 하다. 자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가? 본질을 관찰하고 해석하여 소화해 내고 나아가서 이용할 것인가? 누가 봐도 우리의 선택은 후자가 되어야 하겠다.
요약과 감상:
어떤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래서 짜증나고 당황될 때, 즉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당신의 생각 혹은 의식이라는 무한의 완충장치를 활용하라. 좀 구식으로 이야기하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어떤 상황이 와도 정신줄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 상황을 관찰하라.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살아냈지 않았나? 따라서 그간 겪은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스트레스 요인들이 많이 있겠지만 지나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그 시점에는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본질을 보지 않고 그 스트레스라는 압력에 눌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과녁을 보고 활을 쏴야 근처라도 간다. 그런데 스트레스에 압도되어 눌리면 과녁이 아니라 땅바닥을 쳐다보게 된다. 머리를 처 박고 활을 쏘는 것이다. 될리가 없다. 심지어 상상해 보라. 머리를 처 박고 활을 쏘는 자세가 잡힐까? 인체 구조상되지도 않는다. 그만큼 완벽하게 틀린 대응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큰 장벽같이만 느껴지는 많은 어려움과 고민이 있을 것이다. 나도 있다. 그런데 것을 계속 관찰하다 보니 장벽이 아니라 레고 블럭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모든 상황이 존재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어떤 상황을 선택하느냐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니었던 것들을 떠올려 보자. 분명히 있다. 엄청 싸움을 잘 하는 녀석인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붙어보니 별 것 아닌 녀석. 이게 스트레스가 아닐까? 내가 주먹을 쥐고 두 눈을 크게 똑바로 뜨고 노려보니(관찰하니) 그 녀석의 눈 빛이 흔들리면서 뒷 걸음치지 않던가? 이제까지 눌려왔던 스트레스를 열거하라. 그리고 하나 하나 노려보면서 본질을 파악해 보자. 밑질 것 없지 않나.
길고도 긴, 그리고 어렵기만 한 문제를 그렇지 않다고 계속 궤변을 늘어 놓는 듯한 나의 글을 오늘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것만 봐도, 여러분들은 스트레스 내성이 장난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런 글을 끝까지 보다니 말이다. 오늘도 좋은 하루, 행복하고 사랑이 가득한 하루 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