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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 나를 내 보이는 방법

자신을 좀 내 보이자. 생각보다 당신은 멋지고 아름답다.

by Eaglecs

최초 기록 2021. 5. 21. 17:06 / 2024. 04. 11 보완



들어가는 말...


나는 소소하게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매번 어떤 글을 쓸지 주제를 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특히 나만을 위한 글을 쓸 때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외부에 내보이려는 목적까지 있을 경우엔 더욱 주제를 정하기가 어렵다. 난 방금 어렵다고 했지 두렵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행이 나는 어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은 어렵지만 할 수는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왜 두렵지 않냐면 주제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지 불가능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번 주제를 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무엇을 정할지 판단하여 정하면 그뿐이다. 그러면 왜 잘 정하지 못할까? 더 인정받고 싶은 욕심과 욕망 때문에 주저하는 것은 아닐까? 글을 썼는데 주목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그리고 그런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도록 멋진 주제를 찾아야만 한다는 욕망과 욕심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주제를 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여기에는 큰 전제 혹은 커다란 착각이 도사리고 있다. 내 글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볼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전제와 크나큰 착각말이다.


정말 많은 독자가 볼 가능성이 낮다면 그렇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음 가는 대로 정해서 그 단어를 기점으로 나의 생각과 느낌을 풀어가는 것이 좀 더 쉽고 합리적 선택이 될 것 같다. 특히 나는 추상적인 단어를 내 식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을 좋아 한다. 빨간 사과를 표현하고 묘사하려면 색감과 질감 그리고 무게와 맛에 대한 평가 그리고 그 사과가 주변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등 구상(具象)적인 관점에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겠다. 그러나 추상적인 내용은 일반적으로 어디에서부터 글을 시작해야 할지 애매하고 답답하다. 그런 점을 나는 좋아한다. 불확실성에 대한 선호가 있는 모양이다. 뭐든 일단 내 가슴속의 단어를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추상과 연결하여 털어놓으면 그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만의 궤변이 시작되곤 한다.


그간 이런 활동은 혼자만의 글쓰기를 통해서 해 왔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는데, 이 곳에서도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추상적 단어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가끔(?) 풀어 낼 것이기 때문에 일부 독자님들은 피로감 혹은 이게 뭐지? 하는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나의 특이함 혹은 취향에 대하여 이해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강요할 사항도 아니다. 다만, 내가 추상적 단어를 기점으로 글을 쓰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혹시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루지 못할, 혹은 통과하거나 해내지 못할 추상적인 상황이 닥치면 그냥 한 번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가면서 도전해 보면 어떨까? 억지로 나의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 역시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본문


묘사.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 현상 따위를 언어로 서술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표현함'이다. 우리는 계속 뭔가 표현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태어나서부터 아기는 원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빽빽 지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기대하는 뭔가를 이루어 내려고 하는 것이겠지. 사실 좀 더 정확히 기술하면 뭔가 이루어 내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어떤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 혹은 느낌을 자기가 갖고 있는 표현 수단을 통하여 밖으로 표출해 낸 것이다. 그렇게 밖으로 표출을 해 내었더니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거나 혹은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는 결과가 도출된 것이겠다. 아직 제대로 생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갓난 아기가 어떤 의도를 갖고 소리를 빽빽 지르기는 어렵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더 맞는 것 같다. 따라서 아기는 단순히 어떤 상황에서 반응을 한 것이고 그 반응으로 인하여 추가적인 결과가 도출된 것이리라.


아기의 빽빽 지르는 소리는 '묘사'가 아니다. 묘사라는 것은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을 더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쉬운 묘사의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글을 쓴다. 다양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일기를 쓴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이 뭔가를 위하여 스스로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일단 묘사 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처럼, 뭔가에 대하여 일단 쓰는 것이 묘사이다. 그게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과 내용을 가지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머리와 가슴 속에 있는 뭔가를 계속 털어 낸다. 그걸 입을 통하여 말로 털어 낼 경우는 공기 중으로 대부분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뭔가 공허하다. 내가 뭘 털어 냈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은가?


뭔가를 입으로 계속 소리라는 방식으로 내 보내면 자신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입으로 발설한 내용이 약 5분 분량이라면 기억에 남아서 복기할 수 있는 것은 1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입으로 말하여진 것은 공기 속으로 대부분 사라진다. 그래서 뭔가 표현을 했는데 거의 아무것도 한 것 같지 않은 찜찜함이 남는다. 말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글은 완전히 다르다. 내가 출력해낸 거의 모든 것들이 분명히 남아 있다. 활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감정이나 순간 혹은 그 어떤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분명히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상당 부분은 지면 위에 남아서 내가 뭘 내보냈는지 나중에 상당히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글로 기술된 묘사는 나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글의 많은 장점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장점이 이렇게 내가 나의 생각, 나의 속 마음, 내 자신의 생각의 모양, 내 머리속과 가슴속에 들어차 있는 뭔가가 밖으로 나온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중간 중간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 보곤 한다. 틀린 철자를 고치기도 하고 문맥이 이상한 것은 수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목적 보다는 내 속에서 뭐가 나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렇게 내 속에서 나온 뭔가를 다시 읽어 보면서 내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묘사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글쓰기의 묘미, 혹은 진정한 맛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보통 우리를 내 보이기 어려워 한다. 우리 자신을 더 잘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멋진 옷을 입고, 화장을 하며, 머리를 단정하게 한다. 그리고 신발을 깨끗이 닦아서 신는다. 걸음 걸이도 조심스럽게 하며, 얼굴 표정도 신경을 쓴다. 이 모든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에게 평가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며, 그 평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민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내 보이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한 번 외출을 하려면 남자나 여자나 이옷 저옷 골라보고, 모자도 써 보고, 머리도 빗고,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린다. 나를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나로부터 방출되는 모든 인상과 에너지가 타인으로부터 '좋게' 해석되길 바라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실 글도 마찬가지다. 일기의 경우라 할지라도 정성들여서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남보다 더 무섭고 냉철한 바로 나의 눈으로 내 글을 쓰고 봐야 하니까 말이다. 일기를 나말고 누가 볼까? 라는 생각으로 막 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정성을 들여서 쓰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전술했듯이 다른 사람의 매와 같은 날카로운 평가도 두렵지만, 사실 가장 날카로운 평가는 나 스스로의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기를 잘 쓰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내가 봐도 글이 허접하고 의미가 없고 문맥도 그저 그렇고 하면 글을 쓴 내가 더 초라해 보이고, 더 부족해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뭔가 나로부터 나오는 출력물의 생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날카롭고 비평적인 외부의 평가 보다 나 스스로 뛰나고 잘나고 뭔가 잘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원초적 욕망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만족을 최소한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출력물을 만들어야 하고, 따라서 그런 나 (언제나 만족할 만한 출력물을 만든다는 보장이 없는 나)를 용인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도 지금 글을 쓰면서 한 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용기로 이렇게 내밀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인지 불현듯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모습조차 바로 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혹시 아는가? 그동안 몰랐지만 나도 혹시 생각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일지? 오늘도 돈 들지 않는 선에서 착각의 자유를 누리면서 글쓰기를 마친다.




요약과 감상 :


나를 내 보이는 많은 방법이 있다. 이곳은 글 쓰기의 장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글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외부로 내 보인다. 2일 전부터 이곳에서 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불과 몇 일 전에 나의 사회적 명함이 없어졌다. 그래서 다급하게 이곳에서 또다른 나의 명함을 판 것 같다. 아직은 스스로 만족하며 자위하는 단계일 뿐 대중의 인정획득은 갈길이 아주 멀지만 그래도 난 새로운 소속감을 획득하여 매우 기쁨에 차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매일 매일 나를 거의 가감없이 내 보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봐도 용기가 가상할 정도로 풀어내고 털어내고 주절대고 있다. 그간 혼자서 글쓰기에 탐닉하며 즐겨 왔다면 여기에서는 좀 더 심혈을 기울여 나를 나타내면서 글쓰기의 묘미를 계속 추구해 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역시 나를 찬찬히 돌아보고 더욱 냉철한 시선으로 모든 상황과 사물을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내가 묘미를 느끼면서 즐겨도 그걸 간혹 '읽어 줘야할'독자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으면 지면 낭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전할 것이다. 계속. 날카로운 나의 눈과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비평적인 나의 가치 평가 기준을 최대한 적용하여 나의 글을 평가한 후에 최소한 나의 독자들이 단 하나의 문장에서라도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글을 쓰면서 '묘미'를 찾고자 한다. 독자님들. 송구하게도 내 글에서 의미를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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