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자갈치시장ㆍ국제시장 배회
하루를 온전히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 돌아오는 길,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고전적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역시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
아침 일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 사상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버스를 보고 놀랐다. 불경기라 그런가? 출근길이 아닌 것 같은데 만석이다. 겨우 좌석을 찾아 앉았다. 나와 같이 앉게 된 그녀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내 나이와 비슷한가? 여자들은 상대방을 볼 때 나이 가늠을 하곤 한다. 처음 타는 버스라 물었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소요되는지. 흔쾌히 설명을 하는 그녀는 친근감이 들었다. 얼굴은 다소 어둡지만 활력이 있는 목소리로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은 운전기사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듣도록 한 시간 내내 이야기를 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짜증 나겠어요."
우리는 창피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는 암환자였다. 병원 가기 위해서 이 버스를 자주 이용한다고. 나보다 여섯 살이 적다. 우리 동네 근처의 00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첫 만남이었지만, 나의 궁금함에 진지하게 답변하는 그녀였다.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어려운 점과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난한 세월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지금 이 세상을 떠나도 울분도, 원망도 없다는 것이다. 삶의 시련이 많이 묻어 있어 눈시울이 붉어 지곤 했다. 병마를 이겨나가는 그녀는 혼자서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밤에 근무하는 남편을 낮에 쉬라고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다는 그녀다. 항암치료를 받는 그녀는 면역이 떨어져 삶에 의욕이 없을 때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기어서라도 음식을 만든다고 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본받을 만했다. 진솔한 그녀 인생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고 전화번호와 집주소를 주었다. 그리고 평범한 나의 삶을 감사한다. 오늘 그녀를 만난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보다, 낡아가는 인연을 정성껏 닦는 일이 더 중요해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십 년 전의 철없던 농담을 꺼내어 다시 웃었고, 서로의 눈가에 자리 잡은 잔주름을 보며 함께 걸어온 세월을 확인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공기가 차갑지만 마음만은 든든하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인연들이 스쳐 지나가도, 나를 온전히 알고 있는 ‘옛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 그것은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외투이자,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래, 역시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 오래된 술이 향기롭듯, 우리의 우정도 그렇게 익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