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관계
요즘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기다림'에 대한 것이다.
그런 때가 있다.
(1) 생일에 친한 친구에게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2) 늘 내가 먼저 연락하고 친구는 먼저 연락하지 않을 때,
(3) 친구가 무슨 일이 있어 보이지만 나에게는 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을 때.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위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가?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대체로 친구에게 서운하고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1) "나는 쟤 생일 때 선물도 해주고 편지도 써줬는데, 쟤는 내 생일에 연락 한 번이 없네. 손절이다."
(2) "맨날 나만 만나자고 연락하고, 쟤는 단 한 번도 먼저 만나자고 안 하네. 날 싫어하나?"
(3) "누가 봐도 무슨 일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너무 싫다. 그럼 나도 이제 너한테 다 숨길 거야."
요즘 사람들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위의 예시처럼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건강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이럴 땐 우리에게는 '기다림'이라는 지혜가 필요하다. 당장 상대를 이해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우선은.. 기다려야 한다.
시간은 우리의 많은 고민을 해결해 주는 편이다. 기다리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 내 생일에 연락을 주지 못한 친구는 언젠가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될 것이고, 나와 수동적으로 연락을 하던 친구도 나중에는 자신이 연락을 받기만 해서 내가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었겠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 것이며, 나에게 사정을 숨긴 친구는 시간이 흐르고 내적 여유가 생기면 그때가 되어서 나에게 사건의 전말을 토로해 줄 것이다. 시간은 상대를 움직이게 만든다.
위의 태도를 극단적인 낙관주의자의 태도로 의심할 수도 있다. 맞다. 미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걸 미리 염두에 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의심하는 당신은 정작 단 한 번이라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상대를 기다려준 적이 있는가? 경험적으로 봤을 때 웬만하면 시간이 다 해결해 줬다. 만약 시간이 흘러도 나의 서운한 감정을 알아차려주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준 셈이다. 그땐 내가 상대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것이다. 시간이 나의 인간관계를 정리할 기준도 잡아주고 기회도 마련해 준 셈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래의 2가지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 2가지 사실이 '지혜로운 기다림'을 도와줄 것이라 생각한다.
1. (친하다면) 상대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2. 상대가 인간관계에 있어 지혜로울 가능성은 낮다.
우리 친구들은 관계적인 요령이 서툴을 뿐이지, 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생일 때 연락도 안 주고, 만나자는 말도 먼저 안 하고, 개인적인 사정을 감추는 게 아닐 것이다.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진짜로 웬만하면 알게 된다.
그리고 상대는 현자(賢者)가 아니다. 상대가 엄청나게 지혜롭고, 현명하고, 어질고, 총명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당신이 서운해할 상황을 먼저 초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작 앞뒤 상황을 고려하고 지혜롭게 대처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당신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감정적으로 우월히 섬세할 가능성도 낮다. 상대가 감정적으로 둔했을 수 있고, 어쩌면 나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소홀했을 수도 있으며, 아님 진짜 단지 깜빡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은 다 그럴 만한 인간적인 사정일 것이니 가벼이 여기면서 나중의 상황을 기다려 보자. 시간이 정답을 알려줄 테니까.
사실 처음에 소개한 사례 3가지는 모두 나의 경험담이다.
(1) 지난 나의 생일에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한 마디의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관계라는 것을. 그러니 기다렸다. 상대가 무슨 일이 있나 고민하지도 않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연락이 왔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못 줬다고 한다. 역시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
(2) 친한 친구가 있다. 근데 돌이켜보면 항상 나만 먼저 연락하고, 먼저 만나자고 했다. 나도 약간의 자존심은 있는 사람인지라 "쟤는 나한테 관심이 없나?" 라며 잠깐 서운해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와 내가 오랜 관계를 유지해 온 진한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나를 좋게 생각하는 관계 중 하나로 여기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허황된 믿음이 아닐 것이라는 바람과 함께, 이번에도 기다렸다. 그래도 티를 조금은 냈다. 상대가 나의 감정을 빨리 알아차려주길 바라며 기다리면서 간접적으로 눈치를 줬다. 역시나 상대도 눈치를 챘는지, 소홀했던 연락을 먼저 많이 해주기 시작했다.
(3) 친한 친구가 있다. 무슨 일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나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사정을 숨기니, 말을 대충대충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 대우를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당연히 사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여유가 생기면 나한테 말 못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여유가 '지금'은 없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천천히 기다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 친구는 개인적인 힘든 사정이 있었다. 단지 나를 멀리하기 위한 '숨김'이 결코 아니었다.
내가 만약 위의 모든 상황에서 친구를 의심하고 비관적인 태도를 가졌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해 상처만 남을 언쟁으로 번져 소중한 관계 몇몇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기다리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상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속단하고 예단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대처다.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 적어도 하나의 사실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상대가 나를 싫어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하나.
그러니 상대가 나를 더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자. 그런 내적 여유를 가질 때까지
멀리서, 조용히.
(2022. 11.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