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조절 일기
카카오 맵에서 강남역에서 수서역까지 23분이 걸린다고 알려준다. 이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과 수서역에서 SRT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이다.
당시의 시각은 오후 9시 33분이었다. 나는 오후 10시에 출발하는 동대구행 SRT를 타야 했다. 27분이 남았다. 지하철도 제때 오지 않았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희대의 럭키 가이 긍정맨이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상상하면 현실이 될 것이다." 개처럼 미친 듯이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개처럼 뛰었다. 정말로 개처럼. 미친개.
강남역에서도 뛰고, 환승하는 곳에도 뛰고, 수서역에 도착해서도 뛰었다. 개처럼 미친 듯이 뛴 덕분에 출발하기 일보 직전의 열차를 마주할 수 있었다. 문을 닫으려 간이 계단을 올라가는 승무원과 눈을 겨우 마주쳐 출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미션 임파서블 수준의 미션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군대에서 체력 달리기 1등한 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 기차 입구에 붙어있는 간이 계단에 오르자마자 기차는 바로 출발했다. 강남역에서부터 단 한 번이라도 쉬었다면 탑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짐이 많아서였을까, 축구를 13년 이상 동안 하면서도 느끼지 못한 고통을 처음 느꼈다. 정말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절반쯤 갔을 때 기차 안에서 깜빡 잠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땐 싸한 기운과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하차 시간을 놓친 것이다. 정확히 10분 늦게 일어났다. 고작 10분 늦게 일어나서 더 괴로웠다. “아 10분만 더 빨리 깨어나지..” 자책하긴 늦었다. 기차는 이미 동대구역을 지나 부산으로 가고 있다. 이런 제기랄. 내가 탄 기차가 마지막 운행 열차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차라 돌아갈 기차도 없고, 내일 아침 일찍 병원 예약도 있었다. 미친 개처럼 뛰느라 몸은 땀에 찌들어 찝찝하고, 너무 피곤한데 잘 데는 없었다. 방랑자가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조건 알람을 맞추고 잤었을 텐데, 너무 피로해 잠에 녹아들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이 그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그 순간이다. 너무 분하고 괴로워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 생각 정리가 되고 차분해질 수 있다. 지금 나의 감정은 너무 괴롭고 무섭다. 힘이 빠진다. 일단은 지금 부산역에 도착했으니 기차에서 내려 대처하고 오겠다. 잠시만요.
중간에 휴대폰으로 잠깐 들어왔어요. (기분 좋아져서 공손. ver) 너무 괴롭고 힘든데, 바깥공기는 너무 좋고 난리잖아요. 부산역 출구에서 나무들이 나를 반겨주네요. 나무는 햇빛에 비추어 잎이 파릇하게 빛날 때만 예쁜 줄 알았는데, 저녁에도 예쁠 수가 있네요. 이리도 선할 수가 없어요. 심호흡 세 번만 하고 가야겠습니다. 자연 사랑 ;)
저는 지금 결국 부산역 인근의 찜질방에 와 있습니다. 세면도구는 다 가지고 있어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오늘 새벽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용을 아끼려고 서울에서도 며칠 동안 찜질방에서 잤는데 이런 부득이한 상황으로 부득이한 지출을 만들어서 아쉽네요. 찜질방 이용료와 다시 돌아갈 기찻값 때문에 30,000 원이라는 불필요한 지출이 생겼어요. 그러니 배가 고파도 감식초로 때워야겠어요.
사람은 역시 글을 쓰면 침착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쓰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감정과 생각을 노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네요. 감정에도 단계가 있어요.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이라면 '흥분 다음은 '침착'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침착 단계로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흥분한 상태를 인정해야 비로소 빨리 침착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앞선 글쓰기를 통해 괴롭고, 힘들고, 무서운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생각을 하는 단계로 빨리 넘어갈 수 있었어요.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흥분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 같네요.
시간이 넉넉했다면 이왕 부산에 온 거, 맛집 몇 군데 들렀다가 대구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어요. 하지만 내일 오전 일찍 병원 예약이 있어서 6시 기차를 예매했습니다 ;)
찜질방에서 짐을 풀고, 씻고, 글 쓰고 하니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네요. 비록 정신없는 새벽이었지만 침착하게 대처한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침착하게 감정을 이해하고 정리했다는 것이죠. 이 해프닝을 글로 읽는 여러분들이야 저의 당시 상황과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려울 거예요. 생략된 상황들도 많았고.. 저는 정말 멘붕이 온 상태였었거든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상황을 개선시킨 것은 내적 글쓰기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힘들고 괴롭거나 멘붕이 왔을 때, 이 글을 떠올리며 본인의 상황을 글로 한 번 써 보길 바랍니다. 차근차근 글을 쓰다 보면 감정 조절이 잘 되고 차분해지는 묘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스마일)
(2022.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