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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타박 Jun 15. 2024

화를 받아들이는 '90초'

분노 조절법


나는 정말로 화가 잘 안 나는 사람이었다. 그 누가 어떤 짓을 해도 마음 깊은 속까지 화가 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화가 나도, 단지 마음 바깥쪽에서 겉도는 가벼운 화였다.



근데 요즘은 좀 다르다. 화가 난다. 깊은 화가 난다. 나는 화병이 났을 때의 정확한 느낌을 잘 모르지만, 요즘 느끼는 깊은 화가 그 부류인 것 같다. 가슴 가운데가 꽉 매이고 깊은 통증을 느낀다. 심장이 아프다.



멀쩡하다가 요즘 들어서 화병이 나려는 이유가 뭘까. 여태껏 화를 묵혔기 때문인가? 울고 싶을 때 참지 말고 울어버리는 게 더 좋은 때가 있듯이, 화를 내고 싶을 때 화를 참지 말고 분출하는 게 더 좋은 때가 있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화가 날 때 화를 참지 말고 분출해서 더 좋은 순간이 언제인가? 그런 순간이 존재하는가?



나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부정적으로 했음을 의미했다. 화를 내야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상황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것이 문제를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내 고집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부정적으로 여겼다. 이기적인 태도니까. 자기 자아만을 보호하기 위해 남에게 화를 내는 그런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화를 억제하며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분명히 예전에는 화는 억제하는 게 쉬웠다. 그런데 화에도 종류가 있는지.. 요즘 느끼는 화는 억제하는 게 조금 힘들다. 내 멘탈 레벨이 낮아진 것인지, 아니면 화를 초래하는 빌런의 레벨이 높아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화가 날 때면 가슴이 쥐어짜듯 아프다. 그래도 힘겹게 억누르고 있다. "고작 이런 화도 참아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인가?"라며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나는 '화를 낸다는 것'을 결코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인스타그램에서 하나의 콘텐츠를 접했다. '화'와 '평정심 유지'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결론은,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감정을 (90초 내로) 제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되게 그럴싸하긴 했지만, 의문이 들었다.



'화나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화가 나면 90초까지는 화를 버럭 내버려도 괜찮다는 의미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화가 나는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제대로 느껴서 해소하라." 쉽게 와닿진 않는다. 그래도 당장 이해 가능한 교훈이 있다. 화가 날 법한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못했다. 나 스스로가 너무 관대해지길 원했던 것 같다. 부처의 수준으로 관대해지는 게 지혜로운 거라 생각한 듯하다.



관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물론 좋은 것이지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약간의 부작용이 생긴 게 아닐까? 화가 날법한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데, 그 상황에서 화 없이 관대하지 못했을 때 나 자신을 너무 의심하고 옭아맸다. 권민창 님의 게시물 속 조언대로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왜 이런 걸로 화가 난 것인지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면서 빠르게 온전히 해소하는 것'이다.



예전까지는 어떻게 멘탈 컨트롤을 잘해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화를 무조건적으로 참는 법을 모르겠다. 이제는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느끼게 된다. 대신 그것은 신중하게 느끼고 90초 안에 컨트롤해 봐야겠다. 화를 온전히 부정하면서 마인드 컨트롤하는 것과, 화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느끼면서 멘탈을 컨트롤하는 것은 다르다. 내 화 자체를 부정하고 너무 억누르니까, 그게 가슴 깊은 곳까지 묵혀져 뒤늦게 한 번에 터지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가슴 깊은 곳에 위치한 무거운 화 주머니에 숨구멍을 뚫어줘야겠다.



그래서 실제로 화가 날 때 (1) 화를 부정하지 말고 (2) 빠르게 온전히 해소하는 것을 시도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확실히 비교적으로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택시에서의 상황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택시 기사님이 최적 경로로 가지 않아서 내가 불편했던 상황이었다.



1. 1주일 전 같았으면, 고작 택시 기사님이 최적 경로로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가 나는 것이냐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며 스스로를 질책하며 내 멘탈 수준을 의심했겠지만, 이번에는 화를 부정하지 않고 편하게 생각해 봤다. "(나쁜말) 최적 경로로 안 가면 손님 입장에선 당연히 빡치지 ㅇㅇ."



2. 심지어 기사님이 최적의 경로 대신 다른 경로로 운행을 하기로 의사결정한 것도 그냥 대충 결정하신 것 같아 보였다. 근데 하필 이때의 손님은 높은 효율을 추구하는 ESTJ 성향의 나다. 이 사람은 그런 상황을 굉 장 히 혐오한다. 시간이 더 들기 때문이거나 돈이 더 들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사소하다. 내가 화가 나는 본질적 이유는 그 택시 기사님이 가지고 있는 안일한 태도다 (좋게 둘러 표현했다). 더 신중히 판단하는 성의를 보이며 나를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다.



3. 직진하면 되는 걸 굳이 우회전해서 꺾어 가셨다. 네비도 직진을 가리켰다. 내 사고 수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사결정이었다. 그래서 직접 여쭤봤다. "왜 우회전하신 거예요? 직진하셨으면 쉽게 갈 수 있었지 않나요?." 역시나. 기사님은 당황하시면서 얼버무리셨다. 이 정도 긴장감만 있어도 기사님이 미련하게 운전할 가능성은 줄어들까 기대했다.



4. 투정일 수도 있지만, 화를 인정하고 차분히 느껴보고, 약간의 직접적 개입까지 하니 높은 흥분은 가라앉았다. 이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단계였다. 나는 손실 비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1) 기사님께서 최적 경로를 가지 않은 것에 따른 '시간적' 추가 비용은 약 8분이었다.


(2) 기사님께서 최적 경로를 가지 않은 것에 따른 '경제적' 추가 비용은 약 2,100원이었다.


(3) 기사님께서 최적 경로를 가지 않은 것에 따라 발생한 심리적 스트레스의 비용은 계산 불가능.



그리곤 생각했다. 과연 8분이라는 시간적 비용과 2,100원이라는 경제적 비용이 내가 화를 낼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당연히 아니다. (1)과 (2)만을 고려하면, 그 상황에서 흥분하는 건 어리석다. 고작 8분이라는 시간적 비용과 2,100원이라는 경제적 비용 때문에 흥분하는 사람인 양,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셈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본능을 가졌다. 이런 본능을 깨버리기엔 상당히 적은 가치를 가진 비용이다. 하지만 내가 결국 흥분하게 된 건 (3)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깊이 흥분할 만한 건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작 8분과 2,100원에 감정 소모하기엔 멘탈 컨트롤이 아쉽다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며 마지막 남은 흥분까지 흘려보냈다. 기사님께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했고, 당장의 상황이 불편한 상황은 맞지만 깊게 흥분할 만한 가치를 가진 상황은 아님을 판단했기에 미련 없이 흥분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화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늦지 않게 빨리 해소한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택시를 이용하는 내내 "고작 이딴 거에 화가 나?"라며 스스로를 의심하며 멘탈을 컨트롤했을 것 같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고 생각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위험할 수도 (묵혔다 터지는) 있다. 화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 나도 화를 느끼는 사람이다. 아마 부처도 화가 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화를 부정하는 게 부처 멘탈이 아니라, 부정하지 않되 빠르고 온전히 해소할 줄 아는 게 부처 멘탈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걸 느낀 게 얼마나 다행인가. 묵힌 화들이 있었고, 어쩌면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을 지금이라도 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겸손한 태도로 흥분을 조절하는 서적들을 많이 읽어봐야겠다.



(2023.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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