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받아들이는 시간
화가 난다. 깊은 화가 난다. 화병이 났을 때의 정확한 느낌을 알지 못한다. 근데 비슷한 류의 화가 생겨나고 있음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가슴 가운데가 꽉 매이고 깊은 통증이 느껴진다. 심장이 아프다.
나는 화가 적은 사람이었다. 누가 어떤 짓을 해도 무심하려 노력했다. 단지 마음 바깥쪽에서 겉도는 가벼운 화만 남기고 억제했다. 그런데 화에도 종류가 있는지 요즘 들어 느끼는 화는 억제가 조금 힘들다. 화를 초래하는 빌런의 레벨이 높아진 건지, 아님 내 멘탈 레벨이 낮아진 건지. 화가 날 때면 가슴이 쥐어짜듯 아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힘겹게 억누르고 있다. "고작 이런 화도 참아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인가?"라며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갑자기 화병이 나려는 이유가 뭘까. 여태껏 화를 묵혔기 때문인가? 울고 싶을 때 참지 말고 울어버리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듯이, 화를 내고 싶을 때 화를 참지 말고 분출하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는 걸까. 근데 난 잘 모르겠다. 화가 날 때 화를 참지 말고 분출해서 더 좋은 순간이 도대체 언제인가. 그런 이기심이 이롭게 통하는 순간이 존재한단 말인가?
나에게 있어 '화를 낸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화를 내야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상황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것이 문제를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내 고집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부정적으로 여긴다. 너무 이기적인 태도니까. 자기 자아만을 보호하기 위해 남에게 화를 내는 그런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마인드컨트롤을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화를 억제하며 살려고 많이 노력한다.
그러다 이런 내용을 봤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짜증에 머리를 쥐뜯어버리고 싶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움을 호소한다.”
“이 감정은 생리학적으로 약 90초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약 90초 동안은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정상적인 상태고, 90초보다 훨씬 오래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건 멘탈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기 마련이지만, 멘탈 코칭의 대가의 말에 따르면 감정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감정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슬픔, 수치심, 자기연민, 체념, 원망. 짜증과 연관된 이 5가지 불쾌한 감정 중에 하나를 느끼면서 단 '90초 동안' 감정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이를 ‘감정 리셋'이라고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해소했을 때 비로소 이성을 되찾을 수 있고, 이런 가벼운 마음가짐에서 불쾌한 감정을 야기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결론은,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90초 내로) 제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되게 그럴싸하긴 했지만, 의문이 들었다.
'화나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화가 나면 90초까지는 화를 버럭 내버려도 괜찮다는 의미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당장 이해 가능한 교훈이 있다. 화가 날 법한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못했다. 나 스스로가 너무 관대해지길 원했던 것 같다. 부처의 수준으로 관대해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관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물론 좋은 것이지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약간의 부작용이 생긴 게 아닐까. 화가 날법한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데, 그 상황에서 화 없이 관대하지 못했을 때 나 자신을 너무 의심하고 옭아맸다. 위의 책 속 조언대로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왜 이런 걸로 화가 난 것인지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면서 빠르게 온전히 해소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멘탈 컨트롤을 잘해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화를 무조건적으로 참는 법은 모르겠다. 이제는 화가 나면 그냥 느끼게 된다. 앞으로도 똑같이 화를 느끼되, 대신 신중하게 느끼고 90초 안에 컨트롤해 봐야겠다. 화 자체를 부정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과, 화를 인정하고 느끼면서 멘탈을 컨트롤하는 것은 다르다. 감정 그 자체를 부정하고 억누르면 그것이 가슴 깊은 곳에 고여 뒤늦게 한 번에 터질 수 있다. 이제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가슴 깊은 곳에 위치한 무거운 화 주머니에 숨구멍을 뚫어줘야겠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화를 느끼는 생명체다. 아마 부처도 화가 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화를 부정하는 게 부처 멘탈이 아니라, 인정하되 빠르고 온전히 해소하여 비울 줄 아는 게 부처 멘탈이다.
(2023. 0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