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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수 Jun 15. 2024

순서 있는 감정

감정 조절 기술


나에게는 원리(순서)가 정해져 있는 감정이 몇 개 있다. 어떤 특정한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의 디폴트 값으로 나오는 감정이 있다. 나는 이를 '순서 있는 감정'이라 부르겠다.




내가 알아내지 못한 순서 있는 감정들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확실하게 언급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대표적으로 2가지가 있다.




1. 자극: 클린 코튼 향기 → 디폴트 감정: 설렘


예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맡았던 향이다. 낯선 경험은 자극적이기 마련이다. 자극적인 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인간이 느끼는 오감 중에서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게 후각이다. 전에 만났던 사람이야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지만, 이 향을 맡으면 묘한 설레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2. 자극: <Don't Start Now>_ Dua Lipa  → 디폴트 감정: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


하트시그널 3의 삽입곡으로 처음 들었다. 하트 시그널에는 매력 있는 남녀 출연자들이 나와서 보는 내가 다 설렐 법한 감정들을 교류한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큰 매력을 가진 이성과 만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많은 삽입곡 중에서 이 노래가 유독 기억에 남아, 이 노래가 들릴 때면 바로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든 글을 쓰든 자기계발을 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 감정들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게 신기했다. 위에서 언급한 두 자극이 최소 2년 이상 지속된 자극이었음에도 여전히 순서 있는 감정으로 남아 있다. 나는 여기에서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기발한 생각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다.




위에서 언급한 순서 있는 감정들처럼 내가 어떤 순서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즉 내 감정 체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분석해 낼 수만 있다면, 내가 앞으로 느끼고 싶은 감정을 계획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땐 클린 코튼 향기를 맡고, 자기계발이 지루하고 생산적으로 살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부족해질 땐 Don't Start Now 노래를 듣는 전략이다. 특정한 자극을 느끼고 바로 그다음 순서로 오는 디폴트 감정이 무엇인지 아니까 감정의 순서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인드 컨트롤에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이 감정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 되새겨 보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잘 되새기어 인지하고 있다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내 감정을 되새겨 보는 과정은 단순하다.



힐링되는 감정을 느꼈다면, "어? 나 지금 되게 힐링되네. 왜 힐링 됐지? 뭐가 이 감정을 불러일으켜 준 걸까."


화가 나는 감정을 느꼈다면, "어? 나 화나네. 화가 잘 안 나는 편인데 이번에는 어떤 무의식 작용이 이루어져 화가 난 거지?"


오기가 생기는 감정을 느꼈다면, "어? 나 오기가 생기네? 정확히 어떤 포인트로 자존심이 건들려서 오기가 생긴 거지?"




이런 식으로 내 감정들을 분석하다 보면 나만의 '순서 있는 감정'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이 글을 작성하기 하루 전인 어제, 새로운 순서 있는 감정을 하나 얻었다.




'어떤 사건'이 생겼고, 그 사건을 떠올리는 자극을 주면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감정이 디폴트 값으로 나온다.




'어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인스타그램 맞팔로우 관계였던 한 자기계발 인플루언서가 있었다. 그분께서 맞팔을 해주셨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지. 그분과 모임을 가지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 했다.




근데 최근에 그분의 팔로잉 숫자가 확연히 줄어든 게 보였다. 팔로잉 정리를 하신 것 같았다. 불안한 예감에 팔로잉을 들여다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팔로잉 정리 대상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맞팔이 끊긴 것이다.




그분만의 기준이 있어서 팔로우를 끊으셨겠지만, 나는 나대로 합리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과는 애초에 자기계발 관련으로 맺어진 인연이었기에, 자기계발적인 측면에서 당시 나의 계정이 그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혹은 갠취)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열심히 살고 싶은 오기가 올라왔다. 이것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책 한 장 더 읽고 싶고, 글쓰기 한 편이라도 더 쓰고 싶었다. 실제로 이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단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는 전자책에서 눈을 뗀 적이 없고, 이 글까지 포함해 이틀 연속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자존심 상하는 부정적인 감정과 동시에, 열심히 살고자 하는 긍정적인 감정이 생겼다. 결국 새로운 순서 있는 감정이 생겼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3. 자극: 그분께서 나를 언팔로우한 사실 → 디폴트 감정: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욕구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이 감정이 왜 생겼는지 생각해 보는 과정이 말로만 들으면 참 쉽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당장 그 감정을 느끼는 순간 속에서 "내가 왜 이 감정을 느꼈지?"라는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이 훈련을 많이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이성적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감정을 느낄 때마다 나의 무의식은 이 감정을 초래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특히 효과적이었던 것은 의식적으로 인식하려 하겠지.




이렇게 나만의 감정 데이터를 잘 분석해서 감정을 유도하는 훈련이 잘 이루어지면, 더 쉽게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할수록 너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쉽고 현명하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위함도 있지만, 나의 감정을 분석한다는 건 결국 사람의 감정을 분석하는 것과도 같다. 사람의 감정을 많이 분석하려 노력하는 것은 사회적 지능을 향상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사회적 지능이 높은 사람은 인생이 쉬워지기 마련이다.




(2023. 04. 27)


순서 있는 감정은 하나의 기술 카드 같다. 어떤 감정을 유도하기 위한 기술 카드.


카드를 더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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