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작은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며 소파를 나뒹구는 형을 봤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왜 저렇게 살까?" 극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술을 좋아하고 담배도 피우는 모습이 겹쳐 보이기라도 한 걸까. 면도도 안 한 형의 그 순간의 모습만큼은 너무 못나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 형은 열심히 일도 하고 있고, 동생인 나한테는 정말 한없이 친절한 형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 착한 형에게 못된 감정을 느끼는가. 단순히 게으른 모습이 보기 싫어서? 아님 형이 더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서?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추론들이 합리적인 추론이라 볼 수 있겠지만 더 고차원적인 이유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격렬한 마음의 작용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형에게서 나를 본 것이다. 형에게서 형을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나태하고 철없던' 내 옛날 모습을 본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그림자'라고 부른다. 나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열등한 모습, 열등하기 때문에 스스로 억제하려 노력하며 사는 그 모습. 그 모습이 상대에게 투영되는 경험을 한다면, 즉 투사가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나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어떠한 감정과 성격을 억제하려 애쓸 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우리의 의도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난다.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더 빨리, 그리고 더 강하게 외부로 다시 드러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우리 내면이다. '나태하고 게으른' 상이 형에게 투영된 것 또한 내가 그것을 강하게 억제해 온 탓이다. 만약 내가 성실하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욕망을 건강하게 추구했다면 지금과 같은 투사를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을 집착적으로 억제하려 노력한 탓에 지금과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다. 비록 그림자가 외부로 투사되는 경험이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대부분 극도의 짜증과 스트레스를 유발), 내 안의 비밀스러운 그림자를 바라볼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무의식이라는 베일에 가려진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님에도 내게 이로운 경험인 이유는, 그림자를 이해할수록 내면의 성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 몸에서 '내가 모르는 나'의 비중이 클수록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객관화가 힘들다. 내게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왜 저런 감정이 드는지 그 원천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자를 이해할수록 무의식을 이해하고 나의 감정과 심리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투사와 같이 그림자를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그림자는 나의 열등한 모습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또한 투사를 경험할 때 스스로를 차분히 돌아보기보다는 그냥 격렬한 감정에 맞추어 버럭 화를 내버리는 것이 우리의 방어기제가 우리에게 명령하는 바이기도 하다. 방어기제의 목표는 당장 내 자아가 상처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방어기제는 일시적인 방어에 그친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인정하고 보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면의 성숙을 지향한다면 내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 안의 투사와 방어기제로 하여금 형에게 박힌 미운털. 내가 박았으니 내가 뽑아야만 한다. 격렬한 감정이 들거든 그 원천은 형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이해하고 마음을 다스리자. 격렬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느끼거나, 그림자가 투영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지혜로운 대처를 하거나. 선택은 나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