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삶의 첫걸음
"살아있는 것은 거의 모두 다른 생명의 죽음 덕분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퇴화이면서 재생이다." _121p
사람은 악하게 태어나 욕망의 덩어리로서 '존재'하려 애쓰지만, 결국 이야기의 결말은 소멸이다. 죽음에 저항하는 짓이 덧없음을 이해하고 나서부터 인간의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느낀다. 우주, 소멸, 무(無) 따위의 단어들로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다가올 죽음을 납득하려니 숨이 가팔라지곤 한다. 그러다 위의 문장을 마주하고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내가 죽음으로부터 고통받는 것은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의 생명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의 생명에서부터 시작하면 이후의 순서는 소멸이다. 내 존재가 사라진다 여기면 고통받기 마련, 관점을 조금 더 당겨야 한다. 나는 원래 없었다. 그러다 새로이 생긴 것이다. 다른 생명의 죽음이 곧 내 생명의 시작과 연결되었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고 순환한다. 잃는 게 있다면 새로 채워질 공간이 생기는 것이며, 얻는 게 있다면 어느 다른 부분에서 잃은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자.
"모든 것은 변하고" _122p 인간은 결국 죽는다. 변화에 저항할 수 없다면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싶다 (생명이 무한하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최선‘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 철학해 보자. 나는 자유를 추구한다. ’나답게 사는 것‘이 나약하게 죽어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다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나'는 뭘까?
우연히 같은 독서 모임 '오ㅇ준 님'의 독후감에서 비슷한 내용이 등장해서 인상깊었다. 그 글에서는 "어디까지가 나인가?" 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오영준님이 군에 복무하던 당시 연대장은 군인들에게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피부까지 '나'라고 여긴다." 라고 주장했다. 피부를 찌르면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족이 다쳐도 내가 다친 것처럼 아프다고 여기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으로 가족들까지 '나'라고 확장해서 여긴다고 답했다. 그리고 결국 "군인은 '나'의 범위를 국가까지 확장해야 한다"며 이야기가 결론지어졌다. 나도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자연스레 고개 끄덕여지면서도 몇 번의 의심을 거쳐 나는 결국 동의하지 못했다.
개인 의견일 뿐이지만, 연대장의 주장 중에서 가족들을 '나'라고 여긴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가족들이 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다치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그 순간의 감정을 돌이켜 보려 애썼다. 마음이 아팠지만 가족이 '나'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보다는 가족이 '나의 무언가'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거 같다. 예를 들어 어릴 적 내 장난감이 고장나서 마음이 아플 때 그 장난감이 ‘나’이기 때문에 속상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장난감은 '나의 무언가'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쳤을 때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리고 '나의 무언가'가 상징하는 것은 '연결'이라는 개념과 연관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마음의 연결이다. 연대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은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조건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조건에, 마음의 연결이 이루어지면 그 대상에 대한 동정이 이뤄진다는 나의 주장까지 더하여 '세상, 혹은 세상의 많은 것들과 연결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차피 죽을 운명인 우리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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