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호수

살다 보면 살기 싫은 순간도 찾아오는 것 같다. 세상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것들이 내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순간.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많이 싫어한다. 표현이 거북하게 들린다. 죽지도 못할 거면서 죽는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무책임해 보인다. 저 사람은 말의 무게가 저렇게 가볍구나 느낀다. 그럼에도 솔직한 마음으로는 요즘 들어 사는 게 싫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도태당해서 힘들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서 힘들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다. 끈질긴 생각의 연속이 나를 지옥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든다. 다른 말로, 이성이 나를 괴롭힌다.



1.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도 나의 이성이다.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무던히 살아갈 수 있는데 굳이 이상은 아직 저 멀리 있음을 알아차리게 만들어서 고통을 느끼게 한다.


2. 득실을 구체적으로 계산하는 것도 나의 이성이다. 투자 실패로 돈을 잃었다면 그 금액의 현실 가치를 굳이 판단하게 만드는 것도 나의 이성이다. "그 돈이면 시그니엘 호캉스 다섯 번은 갔겠다."


3. 내 운명(죽음)을 이해하는 것도 나의 이성이다. 나는 결국 죽는다는 받아들이기 무서운 사실을 굳이 상기시킨다.



이러한 이성의 작용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스크롤 내리며 눈으로 몇 자 읽으면 끝나는 내용이라 가벼이 여길까 봐 한탄하건대, 요약한 내용일 뿐이다. 수만 자 이상으로 생각의 꼬리를 나열할 수 있으며, 특히나 3번의 예시 같은 경우에는 나를 가벼운 호흡곤란까지 이르게 하는 항목이다.



생각으로 고통받는다면 생각으로 치유해야 마땅하다. 끊임없이 긍정적으로 자기 세뇌의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그러한 위로는 '나만의 철학'으로 간주되곤 한다.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생각으로 고통받는다면 생각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말은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괴롭히는 건 현실이 아니라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가만히 존재한다. 바뀌는 건 단지 나의 생각일 뿐이며, 그 생각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사람을 만든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의 이성을 이길 또 다른 이성을 찾아 싸움을 붙인다.


뒤늦게 찾은 이성이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죽고 싶다는 말은 참 속상한 표현이다.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죽어도 된다'고 표현할 것 같다. 죽고 싶다는 말은 그만큼이나 고통 없이 잘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인 것 같다.



(2025.08.14)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