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게 바라보는 색안경
오전 7시. 아침 일찍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조급한 마음에 외출할 준비도 끝내지 않은 채 택시를 호출했다.
"택시 미리 잡아놔야겠다."
호출한 지 2초도 안 되어 택시가 귀신같이 배정되었다. 심지어 코앞에 위치한 택시였다. 젠장, 나는 택시가 늦게 도착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미리 잡은 건데, 너무 서둘렀다. 택시 기사님이 집 앞에서 오래 기다리게 되실 게 뻔하다.
택시가 배정되고 5분은 족히 흘렀을까, 그제야 문밖을 나섰다. 기다리고 계신 기사님께서 화라도 내실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기사님의 재촉 전화도 안 온다. 더 불안하다.
"기사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음을 졸이며 급하게 택시를 탔다. 타자마자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기사님 표정을 보니 큰 불만을 가진 것 같아 보이진 않으셨다. 정말 다행이다. 다행은 다행이지만.. 나는 보였다. 기사님의 입 주변 근육이 움직이려는 걸.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게 분명했다. 쓴소리 하시면 꿍하게 듣고만 있어야지 뭐. 내가 잘못한 건데.
기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호출이 너무 일찍 잡혔지요~? ☺️"
이게 뭘까..? 호출 잡은 사람이 7분이나 뒤에야 나타났는데 그동안 단 한 번의 재촉 전화도 걸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다가 손님이 타자마자 호출이 일찍 잡혔다며 오히려 손님의 조급한 마음을 헤아린다. 뭐 하시는 분일까 (택시 기사님이시다). 각박한 현대 사람들의 인정 없고 삭막한 태도를 생각하면 꽤나 괴리감이 느껴진다. 여느 때처럼 태평스러운 하루의 오전 7시부터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좋은 사람들만 보일까? 물론 나쁜 사람들도 보이지만 나와는 엮이지 않는다. 내 주변에는 왜 이리 선한 사람들만 보일까. 이쯤 되면 의심스럽다. 해피 시나리오 트루먼쇼인가?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나한테 있어서 '선함'의 기준이 낮은 건가?"
나는 이 생각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것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좋게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라면 그냥 단순히 미소짓고 넘겼을 일로 이렇게 긴 글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 주변에 착한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니라, 나의 내면에 일어나는 긍정적인 감정의 기준이 낮은 것뿐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긍정적인 감정의 기준이 낮아서 안 좋을 건 없다. 지금처럼 세상을,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을 더 아름답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자기 탐구를 좋아하는 나로서, 세상을 유독 좋게 바라보는 내 감정의 시스템이 궁금했다. 착한 사람들이 많다고 느껴지는 것이 정말 나의 내면 속 긍정적인 감정의 기준이 낮은 것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나는 내 감정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가진 하나의 감정 시스템을 알아차렸다. 내가 세상을 선하게 바라보는 것은, 반대로 세상을 나쁘게 바라보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시말해 부정적인 것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눈앞의 현상과 사물을 쉽게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일례로, 나는 사람의 감정이 이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숫자 1, 2, 3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이 숫자들이 연속되어 있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수들이 더 존재한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끈끈이 이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감정에도 행복함, 기쁨, 화남 사이에 수많은 감정들이 유기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한 사람이 가진 모든 감정으로써 ‘전체성’을 나타낸다.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한 쪽을 당기면 다른 한 쪽도 덩달아 당겨진다. 같은 맥락으로, 만약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의 기준이 높으면 긍정적인 감정의 기준도 자연스럽게 낮아진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의 기준이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이 흔히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나는 덤덤하게 넘길 때가 많았다. 내 기준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이 나오는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상황은 사실 몇 번 곱씹어보면 그리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법한 상황들은 아님을 통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승연애’, ‘원나잇충 남성’의 경우를 두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시야를 넓게 하고 보면 그리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면 무덤해질 수 있다.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
환승연애: 진화적인 관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과거의 인간은 끊임없이 높은 가치의 유전자를 가진 배우자를 쟁취하기 위해 경쟁했다. 더 매력적인 상대가 날 때마다 본능성으로 욕심냈다. 그런 욕심이 생존과 종족 번식에 유리했다. 이미 배우자와 자녀가 있다고 해서 안주하는 태도가 오히려 열등한 태도였다. 물론, 지금은 격조있는 태도로 사회활동을 하는 시기로서 본능적인 태도를 억제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본능이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나잇충 남성: 위의 논리와 비슷하다. 과거에는 종족 번식이 중요했다. 수컷은 닥치는 대로 최대한 씨(?)를 많이 뿌려야 했다. 그것이 번식에 유리했다. 유전자를 후대에 전해줘야 했다. 반면 암컷은 신중해야 했다. 단 하나의 난자로 10개월 동안에나 임신을 하기 때문이다. 수컷과 비교해서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율적으로도 원나잇충 '여성'보다는 원나잇충 '남성'이 더 많다. 이런 현상은 윤리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을 떠나, 비정상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유전자의 시스템을 이해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도 일반적인 상황이다.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던 현상을 예측가능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결코 이전만큼 화가 날 수는 없다. 그것의 윤리성을 떠나, 적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는 여길 수 있게 된다. 우리 본능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명력하는데 동물적인 사람이 어쩌겠나. 관계적으로 환승을 하고 원나잇을 즐기는 무모한 사람은 사회적 지능이 낮은 안타까운 사람일 뿐, ‘악한 사람’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 외의 부정적인 상황도 ‘상황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리'를 먼저 통찰하게 되면 사람은 관대해진다. 결코 처음 느낀 흥분을 가지지는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상황을 납득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조절해 왔고, 그 방식대로 나의 감정 시스템은 형성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아 보이는 상황마저 일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며,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는 상황을 적게 유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글에서 ‘감정적인 감정의 기준이 높다’고 표현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왔다. 요약해서, 부정적인 감정의 기준이 높아지면 사람은 많이 너그러워진다. 감정 변화가 크게 요동치지 않고 고요하다. 자신을 자극시키는 상황이 많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의 기준은 낮아지고,
“긍정적인 감정이 마음 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끝으로,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정중히 인사드렸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ps.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더 선하게 비추어지길 바랍니다.
(2022. 08.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