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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기억

지나서 쓰는 교행 일기

by 옹기종기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여 년 전.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숙제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친구를 만나 놀지도 않고 내 방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 하루종일 나만의 '삼국지 만화'를 그려댔다. 내가 그린 삼국지 만화 속에서는 조조가 삼국통일을 하지도 못했고, 관우가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본래의 스토리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지극히 나만의 바람이 담긴 삼국지였다. 방구석에 앉아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열심히 쓱싹쓱싹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금방 엄마아빠가 퇴근을 해서 집에 왔고, 또 금방 해가 저물어 다같이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쩜 그렇게 긴 시간을 고작 만화 그리기에 몰두했었는지 모르겠다. 혼자 열심히 집중해서 만화를 그릴 때의 그 짜릿함과 충만함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지금보니 재밌다...?ㅎㅎ


갑자기 뜬금없이 어린 시절의 만화 그리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득 내 삶에서 그 때처럼 그 어떤 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저 '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했던 것이 언제였나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언젠가부터 무엇을 할때 지금 하는 내 행동이 향후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가령 책 한 권을 읽어도 지금 읽는 이 책이 나한테 필요한 지식을 담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고 딱히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안되겠다싶으면 그때부터 그 책을 읽는 시간이 '시간 낭비'로 느껴지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편하게 쉬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침대 위에 누워 유튜브나 보고 잠이나 자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


요즘 어른이 된 이후의 내 삶이 공허하다면 그 주된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어린 시절엔 쉽게 했던 '순수한 몰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지 만화를 그릴 때처럼 그 행동 자체에 몰입하지 못하고 자꾸 그 행동을 무언가의 수단이나 도구로 받아들일 때, 그 행동들은 역설적으로 모두 지루하고 의미없는 시간들이 되어버린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고 싶지만, 오히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노력할수록 방구석에 앉아 조용히 만화를 그리던 어린 시절의 행복한 내 모습에서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쓸쓸한 생각이 든다.


2022. 3. 23.(수)의 일기

우연히 어린 시절 그렸던 삼국지 만화책을 발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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