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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깊은 잠, 그리고 꿈 이야기

의원면직한 해의 일기

by 옹기종기

2020년 2월 동사무소에서 oo과로 발령이 나 구청에서 일한 지 3주가 지났다.

지난 3주간 내가 할 수 있을까?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공문들이 쏟아졌고, 그래도 꾸역꾸역 지난 3주치 공문을 기한 내에 다 처리해왔다. 물론 처리한 만큼 더 복잡한 공문들이 결재대기함에 쌓여 있다.

어제 야근 중에 들었던 6급 주무관의 말처럼,


"시간이 가기를 빌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쉽든 어렵든 한 주씩 한 주씩 버텨나가는 수밖에...


잊어버리기 전에 꿈 이야기를 해보자.

3주차 근무를 마치고 간만에 깊은 잠에 든 지난밤. 뜬금없이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꿈에 나왔다. oo이, xx이, qq이... 모두 어렸을 때의 순진한 얼굴을 하고 모여 있었다. 스타크래프트 얘기도 하고, 축구 얘기도 했다.

그러는 중 갑자기 배경이 바뀌어 스타크래프트 대회 결승전 스튜디오에 우리는 와 있었고, 결승전에 진출한 나를 다른 친구들이 응원해줬다. 초조한 마음으로 대결이 진행됐고, 결과는 나의 3:0 승리. 이전에 펼쳐졌던 대회까지 수십 번 우승한 스타가 되어있었다. 나는 스튜디오를 나오며 oo이에게 말했다.


"야 그래도 백 명중에 한 명은 나 알아보겠지?"

"야 당연히 알아보지."


그러다가 갑자기 배경이 또 바뀌었다. 어렸을 때 살던 k아파트다.

현관문을 여니, 입구에 당시 잘 나가던 연예인들이 출연한 티브이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었다. 거친 아날로그 화면에 젊은 시절의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그들의 촌스러운 모습에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이런 시기에 뜬금없는 소년기 시절의 기억이 꿈에 나왔다. 심지어 지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관계가 멀어진 친구들까지... 그 당시의 설렘, 긴장감, 편안함 등이 꿈속에서나마 스치듯이 느껴졌다. 착하고 어리숙한 나, 친구들, 유년시절의 기억이 담긴 k아파트.


참 슬프지만 그때가 편하고 좋았었나보다. 꿈 속에서 내가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우승하는 모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우습게도 친구들과 어울려 피시방에서 스타크래프트나 하던 그때였다는 걸 말해주는 모양이다. 15년 전 일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때 같이 교복차림으로 피시방에 다녔던 친구들은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문득 지난 시간이 너무 허무하게 지나간게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스친다. 뭐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25년 전, 35년 전 일이 되겠지마는...


현실과 동떨어진 유년의 기억들이 꿈에 나오는 걸 보면, 요 몇 주 내가 참 힘들긴 힘들었나보다. 민원 없는 동사무소에서 제일 편한 일을 하다가, 민원이 제일 많은 구청 과에서 제일 어려운 일을 맡으니 정말 죽을 맛이다. 인감 안 떼준다고 진상 부리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리워질 정도다. 물론 당연히 거쳐야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한 주 한 주 버티고 있지만, 언제 무너질지 멈추게 될지...자신이 없다.


"안되겠다 싶을 때, 바로 멈춰야지. 정말로."


아무튼 그래도 여자친구와 대판 싸운 발령 첫째주 주말보단,

주말 내내 의원면직, 퇴사, 불안장애, 공황장애, 우울증, 강박증, 진로 고민...이런 것만 검색했던 둘째 주 주말보단, 그래도 버틸만한 셋째주 주말이다. 언제 위기가 또 찾아올진 모르겠지만...당장을 즐겨야지.


또 지난 30년동안 그래왔듯이 어떤 방식이 됐든, 내 인생은 꽤 괜찮은 방향으로 나를 데려다줄 것이기 때문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나 자신에게 파이팅!


2020년 3월 첫째주 주말에 씀.


ps. 재작년 일반행정직으로 구청에 발령나고 얼마 안돼서 쓴 글입니다. 발령 직후 코로나 확진자가 생겨 발령 첫 주에만 주말 이틀 포함 초과근무 30시간을 하고, 그마저도 다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ㅎ 일기상으론 3주차에 뭔가 적응이 좀 된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의원면직을 하게된 8개월차까지 쏟아지는 민원 전화와 업무량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직장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때도 아무 걱정없던 유년 시절에서 15년이나 멀어졌다고 생각하며 쓸쓸해했었는데, 지금은 저때보다 또 2년이란 시간이 멀어졌습니다..ㅋㅋ 시간이 참 빨리 가네요. 언젠간 이 글을 남기는 이 순간도 추억으로 남게 되겠죠.ㅎ 오늘도 소중한 하루하루를 멋지게 보내고 있는 여러분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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