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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연필 Jan 31. 2024

이쁘다, 참 이뻐

우리 분례, 큰딸 분례, 내 딸 분례

“할머니, 봄 되면 꽃 보러 가요.”     


나는 휠체어를 밀며 요양병원 로비를 돌고 있었다. 시외할머니 생신을 맞아 어머니를 따라나선 길이었다. 할머니는 로비 곳곳에 놓인 커다란 화분들 속, 계절을 잊은 채 피어난 꽃들을 보며 “이쁘다, 참 이뻐”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봄 되면, 꽃 보러 가요, 할머니.”

할머니가 나를 돌아보며 웃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창밖에 흩날리던 하얀 눈송이는 기억난다. 유난히 눈이 푸지던 겨울이었다. 할머니는 그 겨울 눈이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세상과 작별했다. 향년 84세였다.      


3년 전 할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급속도로 기력을 잃어갔다. 잊을 만하면 넘어져, 어떤 날은 다리에 또 어떤 날은 팔에 골절상을 입었다. 골절 때문에 병원 신세를 자주 지게 되자, 자식들은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할머니의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했던 게.

    

가장 처음 할머니의 기억에서 지워진 자식은 집안의 장손 막냇삼촌이었다.

“누나, 엄마가 어떻게 내 얼굴을 잊어! 장손인 나를 잊는 게 말이 돼?”

삼촌은 술만 마셨다 하면, ‘큰누나’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요양병원에 모시는 게 아니었는데, 힘들어도 내가 모셨어야 했는데,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머니는 “치매가 그런 병이잖니”라며 술 취한 삼촌을 다독였다.  

   

할머니는 마흔 넘어 삼촌을 낳았다. 열 번째 자식이었고, 유일한 독자였다. 힘들게 얻은 아들이었던 만큼, 삼촌은 귀하게 대접받으며 자랐다. 삼촌은 가장 어렸지만, 항상 중심이었고 항상 법이었다.

     

할머니의 머릿속에 낀 안개가 한 겹씩 짙어질 때마다, 자식들의 얼굴도 하나씩 사라졌다.

“그래도 다행이야. 엄마는 기억력 말고는 다 온전하잖아. 치매 걸린 노인네들 패악 부리기 시작하면, 간병인 구하기도 쉽지 않다던데.”

어머니와 형제들은 쉬쉬하며 안도했다. 삼촌은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어머니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치매는, 그런 병이었으니까.

    

할머니의 머릿속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큰딸인, 우리 어머니였다.

“엄마가 다 기억을 못 하는데, 나는 알아봐. 신기하지.”

어머니는 그 말을 할 때 손등으로 눈가를 찍었다.

“우리 미란이, 큰딸 미란이, 내 딸 미란이, 하고 부르는데, 눈물 참느라 혼났다.”


우리 미란이, 큰딸 미란이, 내 딸 미란이…….


나는 입속으로 어머니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왔다.     


그 후로도 나는 어머니와 남편을 통해 간간이 할머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에게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봄 되면 요양병원 근처 공원이라도 모시고 가야지.

나는 하루빨리 개나리, 철쭉, 벚꽃이 다투어 피는 봄이 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할머니는 결국 봄꽃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처음 할머니의 이름을 알게 됐다.

권분례.

영정사진 속 할머니는 표정이 없었다.      





뉴스에서 이상기온으로 봄꽃 개화 시기가 빨라질 거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나는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딸로 태어나 아들을 낳기 위해 딸 아홉을 낳은 할머니. 마침내 열 번째 자식인 아들을 낳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펑펑 눈물을 흘렸을 할머니. 할머니 역시 젊었을 땐 봄꽃처럼 찬란하게 인생을 꽃피우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다가올 봄 내내 꽃을 볼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이쁘다, 참 이뻐……. 우리 분례, 큰딸 분례, 내 딸 분례…….


어디선가 할머니의 목소리가, 할머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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