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언 13:3)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는 무릇 남자는 입이 무겁고 말수가 적어야 한다고 가르치곤 하셨다. 철없고 배움이 얕았던 나로선 당시 아버지 말씀의 의미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말수 없는 삶을 실천하고자 나름 노력했었던 것 같다. 천성이 내성적이라 말수가 적었던 건지, 말수가 적어서 내성적이 된 건지 전후 인과관계를 따질 틈도 없이 난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났다. 어른이 되어 그때 그 시절의 기억 앨범을 뒤져 보면 말로 인해 타인과 심각한 분쟁을 일으켰던 페이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긴 말을 별로 하지 않았으니 언쟁의 중심과 현장에 굳이 날 위한 자리는 없었는지도.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극단적인 벙어리 코스프레를 강요하신 건 아니었다. 아마 쓸데없는 말을 줄이고 필요한 말만 하라는 게 진의일 것이다. 차츰 나이가 차서 더 큰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하다 보니 아버지의 가르침이 사실 인생에서 새겨야 할 진리 중에 하나였음을 실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넓은 사회공동체에 발을 디디고 다채로운 화법을 가진 사람들과 섞이어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다 보니 담백하고 무채색이었던 내 화법은 점차 정체를 알 수 없는, 차마 색깔이라고 정의하기에도 무색한 그로테스크한 화법으로 변질되어 갔다. 남들이 내뱉는 거칠고 성적인 표현, 유쾌한 농, 센스와 위트 넘치는 말들이 대화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긍정의 화법이라 착각하여 그것들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자 했다. 내가 만든 음식이 싱겁다고 자극적인 양념을 계속 때려 박은 셈이다.
다른 사람들의 화법이 이리저리 섞여 있어 도통 무슨 맛인지 모르겠을 잡탕 같은 내 화법은, 내 본연의 의도와 달리 상대방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일쑤였다. 악의가 없이 던진 농이었는데 상대방은 악의가 담긴 공격이라며 날 언짢게 본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인 관계는 꼬이고 틀어지고 급기야 끊어지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어설픈 모방은 내 고유의 담박했던 말맛의 상실로 이어졌다. 어느새 난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는 언어의 속물이 되어 있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매를 자청한다고 성경에 기록했다. 난 얼마나 미련한 자였고 얼마나 많은 매를 스스로 벌었던가. 그동안 내 더러운 입이 배설했던 말들이 혹여나 참기 힘든 악취로 가득 차 있었던 건 아니었나.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상대방의 폐부를 찌를 수 있음을 여실히 느끼는 요즘, 지극히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에서 혀를 굴리고 싶다. 그리고 때론 내 혀가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그들의 기쁨을 끌어낼 수 있기를 살짝 욕심내어 본다.
불법 입방정 단속에 걸리셨습니다. 과태료는 딱히 없지만 '말을 참 예쁘게 하는 사람'이라는 자격증은 반납하시길 바랍니다.
커피가 밍밍하다고 설탕을 한 스푼 두 스푼 추가하다 보면 결국 그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이빨은 언젠가 썩게 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