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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Jul 11. 2024

감사학 개론 수강 신청하세요.

감사의 등급

얼굴 전체에 기미가 군데군데 끼었고 황갈색 뿔테 안경을 지그시 눌러쓴 교수는 쉰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는 허름한 칠판 앞 세월의 중력을 견디고 있는 목재 강단 위에 서서 열성적으로 '감사학 개론' 강의를 진행 중이다. 열너덧 명의 수강생들은 졸린 눈을 톱질하듯 좌우로 비벼가며 지루한 강의가 어서 끝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수는 병든 병아리 같이 꾸벅대는 학생들의 모습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강의의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여러분, 감사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한 학생이 성의 없이 '고마움이요.'라고 답변한다.) 그렇죠. 졸린 와중에도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학생들 웃음) 감사란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나 태도를 뜻합니다. 여러분은 삶을 살아가면서 아니면 하루의 삶 속에서 보통 어떤 상황일 때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나요? (아까 답변한 학생이 '교수님께서 학점을 잘 주실 때요.'라고 농담을 던진다. 학생들이 호응하듯 웃음으로 반응해 준다.) 하하하. 좋은 학점을 얻는 상황이라. 분명 감사해야 할 상황인 건 맞지만 그건 학점을 잘 맞은 학생이 출석, 시험, 레포트 작성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온, 어찌 보면 피땀 어린 과정에 대한 응당의 결과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노력에 비해 학점이 잘 나온 학생들이야 분명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 맞아 보이구요. (농담을 던진 학생을 비롯하여 몇몇 학생들이 어색하고 무안한 웃음소리를 낸다. 지루했던 강의에 점차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개 좋은 일이 있어야 자연스레 감사의 마음이 생기는 거라 생각들 하겠지만 이는 감사의 본질을 너무 편협한 시각에 가두어 버리는 우물 안 개구리의 사고입니다. 우린 감사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물이 아닌 개울과 강과 바다로 나아가야지요. 비단 좋은 일이 있어야지만 감사가 나오는 것일까요? 나쁜 일과 감사라는 정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개의 차원일까요? (학생들이 약간 이해할 수 없는 표정들로 교수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


이제부터 감사라는 열매에 감춰진 진짜 속살을 깊숙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감사의 껍데기만 봐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감사에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사실 추상적인 관념에 구체적인 등급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때론 이런 모순 속에 인생의 진리와 지혜가 담겨 있기도 하지요. 이 시간엔 인문, 철학적 관점에서 감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엔 하수, 중수, 고수의 상대적 등급이 존재합니다.


먼저 '감사의 하수'는 기본적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상대방의 호의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유형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자녀에게 용돈을 주는 상황에서 그저 시큰둥한 태도로 감사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용돈을 호주머니에 무심히 챙겨 넣은 채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리는 자녀들이 감사의 하수라고 볼 수 있겠네요. 돈이란 게 어디 땅 파면 나옵니까? 비록 용돈이라고 하지만 거저 얻는 꽁돈이나 마찬가지니 감사할 줄 알아야지요.(학생들 웃음)


'감사의 중수'는 하수보다야 더 낫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이 있으면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할 줄은 압니다. 하지만 지극히 그때뿐입니다. 곧 감사했던 상황을 금세 잊어버리고 모이를 는 공원의 비둘기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감사의 모이를 넙죽 받아먹는 유형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최대 약점은 안 좋은 일이 생겼을 경우 좌절과 절망의 깊이를 상당히 깊다고 여기는 점입니다. 좋은 일에만 감사를 느껴 왔으니 상대적으로 나쁜 일이 생기면 멘털이 취약해지는 편이지요. 구체적인 통계 자료는 없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유형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감사할 줄 안다는 게 어딥니까?(학생들 웃음)


자, 이제 마지막으로 '감사의 고수'만 남았지요? 혹시 여러분들은 '감사의 고수'가 어떤 유형인지 미리 감이 오시나요?(학생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확인한 후) 음, 대부분 감이 안 오는 표정들이군요. 이 교실엔 감사의 하수와 중수뿐인가요?(학생들 웃음) '감사의 고수'는 나쁜 일이 있어도 감사할 줄 알며, 보통의 일상에도 감사할 줄 알며, 좋은 일이 있어도 묵묵히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련마저 감사로 승화시킬 줄 아는 강인하고 노련한 내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시나요? 아주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머니가 기껏 대청소를 해놨는데 두 아들 녀석이 청소해 놓은 게 무색할 정도로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고 가정하죠. 어머니 입장에선 화가 부글부글 치밀어 오를만한 상황이죠.(웃음) 하지만 어머니는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대신 그 자리에 감사의 마음을 채워 넣습니다. (학생들의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확인하고) 어느 포인트에서 감사를 해야 할지 이해가 안된다구요? 어머니 입장에선 비록 집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집을 어지럽힐 수 있는, 에너지 넘치는 소중한 아이들이 있음에 감사한 것이죠. 아기가 생기지 않아 애태우는 가정들을 생각하면 말이죠.(학생들이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이렇듯 감사의 범위를 넓게 확장하고 불쾌한 감정덩어리들을 감사로 승화시키면 결국엔 사랑이란 감정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감사의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고 자신의 삶과 인생을 좀 더 사랑해 봅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시간까지 사소한 것이든 소중한 것이든 보통의 일상 속에서 감사할 거리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몽땅 찾아서 레포트에 정리해 오시기 바랍니다.


최소 100개 이상!!!(학생들, 좌절한다.)



인생이란 프리즘에 감사의 빛줄기를 쏴 봐. 무지갯빛 따스하고 다채로운 삶이 네 앞에 펼쳐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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