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수행평가시즌이 시작되자 학교는까악까악대는'100점무새' 철새들의 도래지가 되어버렸다.과연 저 까악거림은 100점을 달라는 협박일까 아니면 자기 글이 100점 짜리라는 것을 위시하는 걸까. 나에게 학생의 협박 따위 통하지 않으니 차라리 전자라면 다행이다. 채점 기준에 철저하게 근거하여 세밀하게 채점한 후 점수에 이의가 있는 학생들에겐 감점 요인을 조목조목 알려주면 그만이다. 문제는 저 까악거림이 후자였을 경우이다. 정말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17살짜리아이들에게 100점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00이란 숫자가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완전수라면 그들에게 100점이란 점수는 일종의 자기완성의 수일 것이다. 하지만 100점이란 점수를 너무 손쉽게 얻어 버린다면(물론 피나는 노력과 재능으로 100점을 맞을 수도 있겠지만) 자칫 교만과 안주의 늪에 빠져 버릴까 봐 걱정이다. 우리의 인생이란 건 어찌 보면 죽는 순간까지 완성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 하는 고된 여정이기 때문이다. 완성이라는 울타리를 너무 낮게 쌓아 올리면 교만과 거만이라불리는 도둑이 제 집인 양 손쉽게 드나들면서 내내면의 숨겨진 보물인, 겸손하고 성실한 자아를 조금씩 훔쳐가 버릴지도 모른다.조금만 잘해도 쉬이 100점을 줘버리는 풍조는 진정 학생들을 위하는 게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듯이 착각하는 사람보단 자신이 아는 게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혜롭다고 했다.그의 제자 플라톤역시 연령별 단계에 맞는 교육과정을 충분히 이수하고 최종 선별된 50세가 되어야 철인(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사회를 통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린 완벽함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순 있어도 이미 완벽하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천재 감독 데미언 셔젤의 입봉작은 그 유명한 <위플래쉬>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스튜디오 밴드의 지휘자 플래처 교수는 한 재즈바에서 그의 제자 앤드류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내 지성에 Whiplash, 말 그대로 채찍질을 가한 섬뜩한 대사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한 구절도 수많은 독자들의 뇌리를 강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위플래시>를 감상하면서 <<데미안>>의 이 글귀를 떠올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우린 알을 깨고 나와 넓은 세상 밖으로 날아가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어느 이름 모를 가정집의 식탁 위에서 프라이 요리로 놓일 테고, 알을 깨고 나온다면 근사한 날개를 가진 새가 되어 자유롭게 비상하며어디든 날갯짓을 할 수 있다.우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운명에 맞서, 완성과 완벽을 향해 꾸준히 그리고 치열하게 날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