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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쌈을 내 돈 주고 사 먹지 않는 이유

보쌈에서 인생을 배운다.

by 이현기 Oct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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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즐겨 먹는 야식 중 굳건하게 상위 랭크를 차지하고 있는 국민 음식 보쌈. 고기를 튀기지 않고 삶아내어 칼로리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 하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대는 적잖이 부담되는 음식이다. 고기도 몇 점 안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왜 가격은 비싼 편에 속할까. 아마도 보쌈에 곁들이는 보쌈김치의 지분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보쌈김치는 묵은지가 아니라 새 김치이기에 매일 김치를 담그는 데 투입하는 노동력과 재료가 가격에 반영되어 있을 터. 즉, 보쌈 가격에는 고깃값만 포함된 게 아니라 새로 담근 보쌈김치값도 책정되어 있는 것이다. 김치는 언제든지 공짜로 리필되는 평범한 밑반찬이라는 인식만 과감히 버린다면 보쌈은 마냥 비싼 음식이라고만 볼 수 없다. 잘 삶은 고기와 잘 담근 보쌈김치, 이 둘이 어울려 보쌈이라는 맛있는 음식으로 태어났다.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래도 물에 빠진 고기보단 기름에 튀긴 고기가 더 맛있는 건 혀도 혀뿌리를 끄덕이며 수긍할 것이다. 그래서 굳이 내 돈 주고 돼지고기를 사 먹는다면 삶은 삼겹살이 나오는 보쌈집보다는 삼겹살을 구워 먹는 식당 쪽으로 발길이 향한다. 비싼 삼겹살 수육을 굳이 내 돈을 지불하고 사 먹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이 사주는 상황이면 이야기가 완전 달라진다. 남이 사주는 보쌈은 최고의 파인 다이닝이다.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보쌈을 먹으러 가자길래 사족을 달지 않고 흔쾌히 따라나섰다. 메인 요리로 28,000원짜리 보쌈 소(小)를 주문하고 함께 곁들일 추어탕도 두 그릇 주문했다. 잠시 후 보쌈김치와 수육을 정갈하게 담은 접시가 테이블 중앙에 놓였다. 고기의 양이 허전해 보여 사장님이 눈치채지 않게 눈대중으로 고깃 조각들을 세어 보니 달랑 14점이었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다. 다음 달 카드 명세서에 보쌈 결제 내역이 찍히는 건 내 카드가 아닌 동창 녀석의 카드이기 때문이다. 난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으로 녀석의 성의와 한없는 은혜에 보답하면 그만이다. 자연스럽게 한 점이라도 더 내 입 안에 가져갈 궁리를 한다. 난 8점, 녀석은 6점.


 홍어삼합엔 묵은지가 딱이라지만 수육은 새 김치랑도 잘 어울린다. 갓 담근 새 김치의 신선하고 알싸한 매콤함이 수육의 느끼함을 잘 잡아준다. 보쌈을 먹다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왜 수육과 보쌈김치 조합을 보쌈이라고 부를까. 외관상 수육이 메인이고 보쌈김치는 약간 보조하는 느낌인데 말이다. 궁금한 건 잠자리까지 가져가지 않는 성격이라 바로 스마트폰의 힘을 빌려 보쌈의 유래를 뒤적거렸다.


 보쌈김치는 절인 배추를 속을 감싸서 만드는 김치의 한 종류인데 어느 때부터 수육과 함께 먹으면서 보쌈이라 불렸다고 한다. '보쌈김치와 수육'이란 음식에서 '보쌈'만 남은 일종의 줄임말인 것이다. 보쌈김치와 수육의 앞글자만 딴 '보수'도 아니고, 둘을 조화시킨 '보쌈육'도 아니고 '보쌈'이라니. 수육 입장에선 자신의 색채가 사라져 버려 서운해할 법한 작명이긴 하다. 생뚱맞지만 짬짜면은 공정과 평등, 민주주의와 배려가 넘치는 작명이다. 짬짜면, 의문의 1승! 아마 나한테 작명을 맡겼다면 식품영양학에 기반한 통섭적 관점에서 센스 있게 '보쌈겹살'이라고 지었을 텐데. '보쌈겹살'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면 다시 '보쌈'으로 줄이면 된다. 어라? 거기서 거기네...


 기왕 보쌈 이야기가 나왔으니 문화적인 방향으로 외연을 확장 시키자면, 과거 조선 시대에는 '보쌈'이라 불리는 납치혼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보쌈'은 혼기를 놓친 남자가 주로 혼자 사는 과부를 보에 싸서 납치해 와 부인으로 삼는 풍습이었다. 노총각은 부인이 생기는 것이고, 외로운 과부는 불가항력적(?)인 힘이지만 다시 배필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조선시대판 윈윈(win-win) 전략일까? 정보를 더 찾아보니 비단 남성이 여성을 납치한 것뿐만 아니라 여성이 남성을 대상으로 보쌈을 했다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도 이렇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인 여성이 있긴 있었나 보다. 하지만 '보쌈'의 주체가 남자든 여자이러한 '보쌈' 풍습은 비열하고 이기적인 한 개인의 욕망이 내재된, 상대방의 의사 따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라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다. 애초부터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만...


 이제부터 현대판 보쌈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부끄럽지만 내 이야기이다.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재미없는 기법으로 만든 이야기이니 참고하시며 읽어 주시길.


 나는 꿈과 사별하고 우두망찰 방 안에만 틀어박혀 살고 있는 과부의 삶과 다름없었다. 모든 열정과 갈망의 피가 식어 버려 다시 꿈을 만날 의지마저 상실한 채 그저 의지박약증에 구속당해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이슥한 야밤, 어두컴컴한 방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몰래 들어와 자고 있던 나의 눈을 가리고 몸을 결박한 후 보에다가 단단히 싸매고 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려 별다른 저항도 없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 몸을 맡겼다. 난 어딘가를 끌려갔고 그곳은 낙원을 가장한 지옥인 세속적 현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 세속적 가치에 보쌈을 당해 현실의 수종을 충실히 들고 있었다. 현실은 가혹하고 매정한 성격이라 자주 그에게 얻어터지고 멍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살기 위해 탈출을 결심했다. 다시 붙잡히지 않기 위해 현실이 방심한 틈을 타 있는 힘껏 도망쳤다. 저 뒤에선 분노한 현실이 쾌락과 향락이라는 추격조를 풀어 온갖 달콤한 말로 꼬드기며 나를 뒤쫓고 있다. 하지만 이젠 속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췄다간 다시 붙잡혀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끌려가 잔인한 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숨이 가파오지만 달릴 수밖에 없다. 다시 붙잡힌다면 뜨거운 인두로 내 이마를 참혹하게 지질지도 모른다. '꿈을 잃고 현실과 영합하려는 극악죄인'이라는 표식이 박혀 있는.


 그래서 오늘도 멈추지 않고 달릴 뿐이다. 내 앞 어딘가에서 꿈이 흘려보낸 시원한 바람결을 맞으며.


방탈출게임 해보셨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갇혀 있을 뿐이에요. 다음 방은 어떤 방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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