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수학 시험 시간. 각양각색의 연필들이 제각각의 리듬감으로종이를 스치며합주를 한다.둔탁하면서도 중독적인 질감 소리들이 만들어내는일필휘지의난타공연이 긴장감 어린 교실의 정적을 뚫고 나오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유독 연필 욕심이 많았다. 다양한 디자인의 연필들이 필통 안을 넉넉하게 채우고 있으면 경제력이 없는 초등학생 주제에 마치 부자가 된 것만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연필심이뭉툭해지면 어머니께서는 손수커터칼로 정성스럽게 연필을 깎아주셨지만 아무래도수작업이었던 터라 연필심 부분은울퉁불퉁할 수밖에 없었다. 난 데셍용 연필을 쓰는 화가지망생은 아니었기에 칼로 절삭된 연필은 뭉텅뭉텅 잘려나간 연필찌꺼기 같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연필 끝의 매끈한 미관을 위해선 연필깎이가 필요했다. 그 당시 초등학생들의 워너비(wannabe) 연필깎이는 하이샤파 은색기차모양 연필깎이였다. 이 연필깎이는 지금도 가격이 꽤 나갈 만큼 당시엔 부르주아초등학생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나 역시 갖고는 싶었지만가성비가 좋지 않아 그냥 놓아주기로 했던 걸로 기억한다. 솔직히 그 연필깎이 하나 살 돈을 가지고 사 먹을 수 있는 학교 앞 튀김 핫도그가 몇 개인데... 쌈짓돈 같은 용돈을 모아서 연필깎이를사기엔 언감생심이고그렇다고 부모님께 그 비싼 걸 사달라고 했다가 괜한 매를 벌 것도 같고...
뭐, 저렴하고 성능이 괜찮은 연필깎이도 많았었기에 효용성을 따져 봤을 때 은색기차모양 연필깎이는값만비싼 외제차나 다름없었다. 효용성을 따지는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어 지금도 비싼 차 대신 가성비 좋은 국산차를 타고, 조금 오래되긴 했어도 직장과 도보 십 분 거리이고24시간 주차 공간이 여유로운아파트에서 안분지족 하며 살고 있는 중이다.(돈이 없다는 핑계를 잘도 꾸며내고있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은색기차 연필깎이
얼마 전 서점에 방문해사고 싶은 책을 고른 후 카운터 앞으로 가니직원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상 연필이출시되었다며 판촉활동을 했다. 일순간 관심이 갔지만 결국 구매하지 않았다. 가격대가 비싸기도 했고, 깎을 필요가 없는 연필은 왠지 연필답지않다는 구시대적판단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무릇 연필은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쓰고 닳고 깎아주는 게 본연의 성질, 즉 '연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지금도 뭔가를 메모하거나 수업 교재 연구를 할 때 샤프펜슬보다 연필을 선호하는 쪽이다. 사실 샤프펜슬은 심을 깎는 추가적 노동이필요하지 않고 적당량의 샤프심만 미리장전해 놓으면 되기 때문에 연필보다야 더 편리해 보일 순 있으나, 필기를 하다가 힘의 배분이조금만 엇나가도 샤프심이 뚝, 하고 끊어져 버리는 결함이 있다.공감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영 사람 기분을 묘하게 거슬리게 한다. 하지만 연필심은 나의 힘을 무난하게 받아주면서 억지로, 과도하게 힘을 주지 않은 이상 쉽게 부러지는 일이 없다. 샤프펜슬보다는 투박할지 몰라도 필기할 때 훨씬 안정감을 주는 것이연필에내재된 든든한매력이다.
어딘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면서 닳아가는 연필,깎여야지만 다시 무언인가를 쓸 수 있는 동력을 얻는 연필에서 우리의 인생살이를 읽는다. 깎이지 않고 매끈하게 뻗어나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깎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연필처럼 우리의 인생도 쓰고 닳고 깎이면서 나아가는 것이다.연필이 종이에 자국을 남기듯 우리도 인생에 족적을 남겨야 한다.닳고 깎일수록 오히려 우리의 인생 종이는 채워져 가는 역설의 미학을연필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세상에 흔적을 남기면서 닳고 깎여야 한다. 깎인다고 해서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 깎이고 깎일수록 새로 인생을 써나갈수 있는 매끈한 흑연이 짠, 하고 부끄럽게 고개를 내밀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다시 써 내려가는것이다. 삶을, 미래를, 그리고 꿈을.
그나저나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인데 왜 전영록 씨의 노래가 생각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