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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와 헤어질 결심

감기몸살에서 인생을 배운다.

by 이현기

출근길에 나서는 순간부터 몸에 이상기운이 감지되었다. 평상시에 신던 신발을 신었는데도 밤 사이 누가 내 신발 밑창에 무거운 납덩이라도 몰래 붙여 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다소 무거웠다. 아직은 젊은 편에 속한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것은 나만의 오만과 편견이었다. 모든 기력이 구멍 난 풍선처럼 푸슝푸슝 새어나가는 듯한 무력감, 밤 깊은 호젓한 야산의 공동묘지를 홀로 거니는 것만 같은 으스스함이 슬금슬금 밀려온다. 감기 기운은 면역력을 비웃으며 육체 곳곳에 세를 뻗치고 있었다. 아마도 최근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면역력 약화로 이어진 것 같다.


20대 때만 하더라도 감기쯤이야 약 없이도 밥만 잘 먹으면 이겨내었었던 것 같은데 점차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와 면역력의 관계는 반비례 그래프의 xy 축임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 상처가 났을 때 딱지가 지고 새살이 돋아 오르는 속도도 예전에 비해 확연히 느려졌다. 조지훈 시인이 <병에게>라는 시에서 말한 것처럼 이젠 정말 병이란 녀석을 가까운 벗으로 여겨야 하는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노화를 늦추고 면역력을 기르는 방법을 강구하다가 새벽 달리기를 해보자는 결심에 이르렀다.


감기 기운이 조금 사그라진 며칠 후, 계획만 세워놓고 실천으로까지 옮기지 않는 나태한 현대인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밤 사이 자연스럽게 스타일링 된 까치집 머리를 깊게 눌러쓴 모자 안에 감추고 동네 테니스장 산책로를 향해 비장하게 전진했다.


테니스장에 도착하자마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100m쯤 뛰었나? 평상시 조용하던 무릎 관절들이 아프다며 아우성을 쳐댄다.

200m쯤 뛰었나? 폐 깊숙한 곳에 수천 개의 바늘이 꽂힌 듯한 고통이 찾아온다.

심장 역시 갑작스러운 혈류량 증가로 인해 아침 댓바람부터 업무 과중에 시달리며 시간 외 수당을 요구한다.


이젠 그만 뛰고 멈추라는 신호를 육체의 각 기관에서 부랴부랴 보내온다. 육체는 이미 한계까지 도달했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정신줄은 100미터 앞에 있는 가로등까지만 뛰어보라고, 더 뛸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결국 단단히 삐친 육체의 신호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기어이 가로등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뜀박질을 멈추고 천천히 걸으면서 숨을 돌렸다.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서 균일하지 않은 호흡을 찬찬히 고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코와 입을 통해 들숨과 날숨을 침착하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점차 육체가 안정되었다. 그리고 또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뛰기와 걷기를 반복했다.

한 3킬로 뛰었나. 시작이 반이다.

달리기를 하며 다리근육들이 뭉쳤지만 정신도 한 데로 뭉쳐진 느낌이 들었다. 어떤 잡념도 낄 틈 없이 목적지향적인 정념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나를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육체의 고통 뒤에 찾아오는 내면의 평화. 체력과 정신력의 팽팽한 줄다리기 후 밀려드는 환희. 내 안의 스트레스를 몽땅 응축하여 피어오른듯한 땀방울들은 때마침 불어 오르는 바람결에 서서히 증발하고 있었다.


육체의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지만 왠지 모르게 내면의 면역력까지 길러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땀을 빼고 나니 무거웠던 머리가 훨씬 가볍고 상쾌하다. 집에 돌아와 끈적한 몸을 찬물로 씻어내리니 봄눈 녹듯 피로감이 사라진다. 오늘 출근길은 발걸음이 가벼울 것만 같다.


들숨처럼 들어온 스트레스는 날숨처럼 날려 보낼 수도 있어. 내면의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어 봐. 그리고 후, 하고 내뱉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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