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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등나무 8

단편소설

by 이현기

날은 계속 속절없이 흘렀고 해가 바뀌었다. 난 2학년이 되었고 다시 봄은 계절처럼 찾아왔다. 인문대학교 앞은 서서히 등나무꽃들이 황홀한 개화를 위해 봉오리를 틀기 시작했다. 겨우내 인기가 시들했던 고풍스러운 벤치는 예약 손님을 받아야 할 정도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개화를 준비하는 등나무꽃을 마주하니 작년에 경주에서 마주친 그녀들이 낡은 사진첩 속 추억처럼 떠올랐다. 인문대학교 앞 화단에 걸터앉아 핸드폰 속 사진 앨범을 재빠른 손놀림으로 지문이 닳도록 뒤적였다. 몇 번의 뒤적거림 끝에 드디어 그녀들의 사진 앞에서 마법같이 손가락이 멈췄다. 그 사진을 마주하니 새삼 왠지 모를 떨림이 찾아왔다. 이 떨림의 근원은 무엇일까? 간단명료한 답을 찾고자 했지만 애매모호한 의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세계에 잠깐 발을 담갔다 빠져나왔다는 묘한 느낌 말고는 떨림의 근원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그 시간 그 공간에 그대로 지금까지 갇혀 있었다. 그녀들이 지어 보인 상냥하지만 무거운 미소도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여기 앉아서 뭐 하냐? 너 요즘도 똥폼은 있는 대로 잡은 채로 지나가는 여학생들한테 추파 던지는 버릇 못 고쳤냐?”


“친구야, 안타깝지만 내 추파에 넘어올 만한 여자는 엄마뿐이다.”


여자를 밝히는 동기 녀석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옆으로 다가와 농을 던졌다. 녀석의 농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어찌 보면 평등에 기반한 공정한 농이었다. 공격성이라는 날카로운 날을 제거하고 맥락에 맞추어 물 흐르듯 건네는 농이었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은 녀석의 농을 기분 좋게 응대해 주었다. 녀석은 전자담배 연기를 싸구려처럼 값싸게 이리저리 살포하며 내 핸드폰 속 사진에 관심을 보였다. 여자 없인 못 사는 호색한 녀석이라 분명 사진 속 그녀들에 대해서 저렴한 성적 비평을 날릴 것이 자명했다.


“어? 이거 경주 갔을 때 봤던 등나무 사진 맞지?”


“담배가 뇌세포를 많이 퇴화시켰을 텐데 용케도 기억하네.”


“친구야, 독일 식약청 발표도 못 봤냐? 연초와 달리 전자담배는 몸에 해롭지 않다고. 내 안에 있는 인생사 모든 스트레스를 이 연기에 담고 또 담아 밖으로 훌훌 떠나보내는 순간, 무병장수의 꿈은 날 향해 또 한 발짝 성큼 다가오고 있단다. ”


녀석은 흡연의 당위성과 명분을 국문학도답게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표현의 완성도가 한참 떨어졌다. 전자담배가 연초보다 이롭다는 거대 권력의 하얀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는 녀석은 사진 속 그녀들보다는 이상하게 등나무에 꽂혀 있었다. 이쁘장하게 생긴 그녀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하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넌 참 독특한 녀석이야. 꽃도 다 져서 말라비틀어진 등나무는 뭐 하러 찍었냐? 여학생들한테 추파 좀 그만 던지고 강의나 들으러 가자. 추파는 우리 백교수님께 던지라고.”


백발의 교수라는 5음절을 일일이 부르기 귀찮았는지 녀석은 교수님의 성을 백 씨로 바꿔버리는 대담함을 보였다. 전자담배의 마지막 연기를 내 얼굴에 낙서처럼 남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날 끌다시피 부여잡고 백발의 김교수님이 등장하실 강의실로 향했다. 남자의 외모보다 여자의 외모에 있어서는 탐미적으로 집착하는 녀석이 그냥 모른 척하기엔 사진 속 그녀들의 얼굴은 평범함을 넘어서 매력적이었다. 경주에서 만났을 때는 그리 매력적으로 생겼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등나무꽃이 필 시기가 다가 오자, 여인들은 보라색 등나무꽃처럼 아름답게 내 머릿속을 수놓아 내 정신을 도취의 경지로까지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녀들이 누구냐는 녀석의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나로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구차하게 변명할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그녀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니,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진 속 그녀들의 눈빛은 날 향해 잘 지내냐며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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