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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등나무 7

단편소설

by 이현기

창문을 베개 삼아 잠깐 존 사이 꿈을 꿨던 것 같다. 깨고 나서도 기억날 정도로 너무 선명한 꿈이었다. 두 여인은 내 꿈까지 지독하게 따라와서 날 귀찮게 했다. 우린 경주 현곡면 오류리에서 다시 만났다. 자매는 여행사 가이드처럼 나를 등나무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꿈이란 세계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여인들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그루의 등나무가 한 그루의 팽나무를 휘감고 있었다. 꽃이 다 진 등나무는 평범한 초록빛 넝쿨나무에 불과했다. 두 여인은 가녀린 두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등나무를 올려보고 있었다. 기이한 형태로 얽혀 있는 등나무를 보고 두 여인은 서러운 눈물방울 몇 줄기를 큰비가 오기 전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마른땅에 떨궜다. 자매의 눈물을 받아먹은 땅에서는 연보랏빛 등나무꽃이 한 떨기 돋아났다. 갓 피어난 등나무꽃은 자매를 닮아 청초하면서도 가녀린 형상이었다. 갑자기 회색빛을 풍기는 폭우가 무섭게 지면을 때리기 시작했다. 거센 빗줄기를 맞은 등나무꽃은 금방 시들어 버렸다. 자매는 등나무숲을 향해 걸어가더니 등나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자매를 품은 등나무는 줄기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서 이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내 눈가에는 눈물샘이 차오르고 있었다. 여자를 밝히는 동기 녀석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날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겨우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나 선명한 꿈이었다.


답사 일행이 경주 현곡면 오류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치원 소풍을 나온 어린아이들처럼 교수님의 인솔을 충실히 따르며 등나무 쪽으로 질서 정연하게 걸어갔다. 아직 꿈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아서 뭐가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구분 못 할 정도로 그저 정신이 멍했다. 태엽 인형처럼 발을 일정하게 굴려대며 걷긴 걸었지만, 내 정신은 온통 꿈에서 두 여인의 눈물방울이 피워낸 연보랏빛 등나무꽃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화사하면서도 애달픔을 품고 있는 등나무꽃. 고작 꽃 한 송이였지만, 꽃에서 그렇게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생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금오봉에서 킥킥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서러움을 안고 있는 두 여인. 그 여인들이 피워 낸 눈물꽃. 찬란한 죽음과 맞닿아있던 연보랏빛 등나무꽃. 꿈에서 봤던 실체도 없는 꽃에 한눈을 팔다 보니 이윽고 전설의 현장이 가까이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무 주변으로 가까이 갈 수 없게 펜스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등나무를 바라봤다. 전설 속 이야기와 달리 네 그루의 등나무였다. 네 그루의 등나무는 수북한 잎사귀로 가지를 치장한 채 한 그루뿐인 팽나무를 꽈배기 과자처럼 휘감고 있었다. 그 형세는 아담한 나무숲 같아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어두컴컴한 무덤같이 보이기도 했다. 서로 얽히고설키어 있는 모습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의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쏙 빼닮았다.


“또 보네요?”


남산에서 마주쳤던 두 여인은 쥐도 새도 모르게 옆으로 접근하여 내 그림자를 밟고 서 있었다. 하마터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세포들은 심장을 재촉하여 심장박동수를 빠르게 늘려나갔다. 의도성이 있는 접근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인연인가? 자매는 아까 남산에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은연중에 공기 속으로 조금씩 살포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애처로운 눈빛을 머금고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내 몸은 땅바닥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자매가 기껏 만들어 놓은 숭고한 분위기의 연출에 NG를 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매는 팽나무를 휘감고 있는 등나무들처럼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등나무에서 계속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 옆에 서 있는 존재는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두 그루의 가녀린 등나무였다.


“사진 찍어 드릴까요?”


갑작스레 사진을 찍어 주고 싶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뜬금없이 그런 말이 왜 방출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명령의 주체는 머리가 아닌 마음속 깊이 존재하여 나도 인지 못 하는 무의식의 한 영역임을 어렴풋이 알 수는 있었다. 환상적인 피사체를 마주하면 자동적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를 켜게 되는 심리보다 더 근원적인 영역이었다. 꽃이 다 져서 힘없이 팽나무를 휘감고 있는 등나무와, 애처로운 눈빛을 머금고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자매는 신이 천년 만에 한 번씩 빚는다는 고차원의 창조물 같았다. 뭐가 자연이고 누가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등나무와 자매는 서로 닮아 있었다. 핸드폰을 주면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조심스레 제안했지만, 자매는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내 핸드폰으로 찍어달라는 부탁을 건넨 후 요조숙녀처럼 등나무 앞으로 차분히 이동하여 내 쪽을 응시하며 담백한 미소로 포즈를 대신하고 있었다. 등나무 앞에서 미소를 품은 피사체들은 카메라 렌즈를 거쳐 핸드폰 액정 속에 등장한 후 최종적으로 내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녀들의 모습을 정면으로 꽤 긴 시간 동안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렌즈의 배율을 확대해서 그녀들의 얼굴을 훔치듯 찬찬히 뜯어보았다. 연보랏빛 등나무꽃처럼 청초하고 우아한 얼굴들을 가졌다. 그녀들이 등나무 앞에 서 있으니, 말라버린 등나무 가지에 다시 향긋한 봄내음이 물씬 나는 등나무꽃이 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나, 둘, 셋 하면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사진을 찍은 후 그녀들은 굳이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멀리서나마 내게 작별의 눈짓을 보낸 후 서로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낯선 동네의 한 귀퉁이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들을 붙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답사 조장의 집합 명령에 나 역시 등나무 곁을 서둘러 떠나야만 했다. 떠나가는 그녀들의 실루엣은 점차 작아졌고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햇빛이 강렬한 오후였지만 나는 떠나가는 그녀들의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 드러나는 실루엣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을 찍었던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봤다. 봄에 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여름이란 계절에 만개한 전설 속 등나무꽃 같았다.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뜨거운 여름의 등나무꽃을 내 가슴속 깊은 곳 어딘가에 살며시 매달았다. 답사 일정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 그녀들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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