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토요일 오전의 경주행 버스는 납치하듯 나를 잡아 태우고 경주를 향해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암흑의 구렁에 깊이 감춰져 있다가 불쑥 튀어나온, 형용할 수 없는 무아(無我)의 이끌림이 날 경주로 이끌었다. 자아가 번쩍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 버스의 창가 쪽에 정갈하게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고 버스는 한 시간째 고속도로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김유신 장군에게 목이 잘린 백마처럼 내 두 다리는 남산으로 자연스럽게 나를 실어 날랐다.
주말이라 그런지 등산객 같기도, 관광객 같기도 한 인파들이 개미 떼처럼 오와 열을 갖추어 산을 정성스럽게 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행동 값이 미리 입력된 로봇처럼 걷는 속도와 보폭이 일정했다. 언뜻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양해 보일 수 있겠지만, 주최 측 남산이 요구하는 표준 옷차림을 제각기 갖추어 남산에 대한 예의와 격식을 차린 듯해 보였다. 나 역시 남산의 기운이 전해주는 미묘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흡수해 가며 걷고 또 걸었다. 창조주는 나 혼자만 ‘이방인 1’로 설정하여 꽤 치밀하게 각본을 짜 놓았다. 나만 남산의 분위기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알맹이를 찾지 못해 겉도는 말라비틀어진 껍데기 같았다.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내가 경주에 왜 왔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 탐문했다. 수학 문제처럼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들이 날 경주로 이끌었다는 게 그나마 가장 답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들을 혹시나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작년 여름의 답사코스를 그대로 밟았다. 기적 같은 확률로 그녀들을 만난다고 해도 어떤 말을 건네야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대한 모범답안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맹렬히 피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녀들과의 만남 이후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들의 사진을 본 이후 내 맘속에는 아련함, 애틋함, 서러움, 설렘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서 질퍽거렸다. 그런 감정들에 잠식되어 심장이 멈춰버리기 전에 그녀들을 봐야만 했다. 갈 곳 없이 떠도는 감정의 뭉게구름들을 걷히게 할 해결의 열쇠는 분명 그녀들이 쥐고 있을 것이다.
애써 찾아간 남산이었지만 그녀들의 흔적은 남산 어디에서도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하긴 경주에서 그녀들을 찾는 일은 이름 모를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깊은 곳에 숨겨놓은 구슬을 찾아야 하는 임무와 유사한 난이도였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처음 만난 남산을 기어이 방문해야만 맘속에 번져 가는 혼란스러운 감정 덩어리들이 스르르 풀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구겨진 활자 신문처럼 잔뜩 뭉쳐 있는 감정 덩어리들은 여전히 반듯하게 펴질 기색이 없었다. 그녀들의 흔적을 계속 따라가 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경주 현곡면 오류리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그곳에 가면 그녀들이 등나무 앞에서 나를 환하게 맞이해 줄 것만 같은 기분이 짜릿한 전기처럼 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전설의 현장에서 전설 같은 일이 기적처럼 찾아오길 내심 기대했다.
버스에서 내려 그녀들이 찍힌 사진 속 그곳을 향해 실종자 수색 작전을 펼치듯 천천히 걸어갔다. 주변에 인파가 그리 많지 않아서 혹시나 그녀들을 이곳에 존재한다면 금방 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진짜 머리처럼 자연스럽게 스타일링을 한 가발을 눌러쓰고 한적한 시골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정장을 걸쳐 입은 중년의 사내가 날 향해 찡긋 웃어주었다. 요즘 같은 핵 개인화 시대와는 매칭이 전혀 안 될 것 같은 영국 신사다운 품위였다. 나 역시 간단한 눈인사로 답했다. 저 멀리서 5, 6세쯤으로 추정되는 꼬마 한 명이 날 향해 속력을 붙이며 달려왔다. 꼬마는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를 신기하게 멀뚱멀뚱 쳐다만 보더니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이내 다른 방향으로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린 꼬마가 부모도 없이 혼자 이곳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물인지 땀인지에 흠뻑 젖은 듯한 남녀커플은 각자의 손을 담요처럼 붙잡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언제나 가슴 떨리고 황홀한 것임을 되새겼다. 내겐 이곳이 타지이긴 했어도 이 공간에 섞이지 못한 채 동떨어진 존재는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