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앞까지 당도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과 강력하게 묶여 있던 시간과 공간은, 튀어 올랐다가 금방 스러지는 물보라처럼 나에게 강렬한 파문을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걸까? 결국 맞지도 않는 열쇠를 가지고 금단의 문을 열려고 했던 나의 오만한 오판이었던 걸까. 아쉬운 마음을 등나무 가지에 무겁게 걸어 놓고 힘겹게 발길을 돌렸다. 남루한 행색을 한 초췌한 중년의 여성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여성의 얼굴에는 세상의 온갖 풍파와 고난, 시련 등이 각인처럼 새겨져 있는 듯했다. 중년 여성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애타는 심정을 담아 종이 전단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등굣길, 학교 정문 앞에서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허리를 굽혀 가며 나누어 주는 학원 홍보 전단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 들곤 했던 내 지난 삶의 이력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작용하여 나를 그 중년 여성 쪽으로 안내했다.
“부탁드립니다. 꼭 좀 잘 살펴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중년 여성은 애처로운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로 전단을 건네주며 나에게 간곡한 호소를 해 왔다. 관광지다 보니까 로컬 식당 홍보 전단일 거라는 지레짐작을 하고 전단을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아 들었다. 중년 여성의 간절한 호소가 전단에 묻어 있었기 때문에 전단을 훑어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발췌독을 하려던 나의 읽기 계획은 순식간에 진지한 정독으로 방향을 급하게 틀었다. 전단 안에 담긴 충격적인 내용은 나를 숨만 쉬고 있는 망부석으로 만들어 버렸다. 걸음을 뗄 수도 없을 만큼, 전단 안에 담긴 내용은 내 안에 남아 있는 모든 기력을 강탈해 가 버렸다. 심장이 멈춰버릴 정도로 동맥과 정맥 속에서 흐르고 있는 피가 그대로 딱딱하게 혈관 벽에 붙어버린 느낌이었다. 전단을 들고 있는 오른손만이 최후의 힘을 부들부들 짜내며 전단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버린 채 전단 속에 또렷하게 박혀 있는 2장의 사진과 인쇄된 글자들을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바라보고 또 읽어 나갔다.
사람을 찾습니다
○ 이름(나이, 성별) : 이미주(만 40세, 1985년생, 여), 이란주(만 38세, 1987년생, 여)
○ 인상착의 및 특징
▷이미주
신장 167cm, 마른 체격, 짧은 단발머리, 하얀색 야구모자(뉴욕 양키스 로고), 남색 계열의 가벼운 아웃도어 점퍼, 청바지, 웃는 인상
▷이란주
신장 160cm, 마른 체격, 갈색의 긴 생머리, 선글라스 착용, 황색 계열의 가벼운 아웃도어 점퍼, 청바지, 웃는 인상
○ 발생 개요
▷2021.4.25.(일) 오전 09시경 이미주, 이란주 자매는 자택에서 등산을 간다고 나와 현재까지 귀가하지 않고 있음
※ 평상시(예상) 운동 경로 : 자택->삼릉->금오봉->약수골
가족 연락처 : 010-0000-0000
주민센터 : 051-000-0000
전단을 뿌리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 자매를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속히 말해야 했다. 내가 전단을 받아 든 사이 중년 여성은 다른 행인들 쪽으로 다가가서 짙은 호소의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알려야 한다. 혼란스러웠지만 작년에 그 자매를 대면했던 순간을 머릿속에 계속 떠올려봤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저 보통의 일상을 누리고 있는 듯한 자매의 모습만이 생각났다. 그때 그 모습은 실종이라는 섬뜩한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중년 여성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등 뒤에서부터 확연한 한기가 드라이아이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날 덮쳐 오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팽팽해진 긴장의 끈을 누군가가 뚝하고 잘라버린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자매는 사진 속 그 모습 그대로 내게 다시 찾아왔다. 서늘한 눈매로 싱글 생글한 웃음을 얼굴에 그리고 있는 자매의 눈동자에는 반가움과 그리움, 기쁨과 슬픔, 아련함과 친밀함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이 밀도 있게 응축되어 있었다. 전단을 뿌리는 중년 여성은 내 옆을 서성거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전단을 뿌려댔지만, 여전히 딸들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난 중년 여성이 절대로 딸을 찾을 수 없었음을, 앞으로도 딸들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곧 내가 몰랐던 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것과 긴밀하게 맞닿아있었다. 나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조금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또 보네요?”
자매가 건네는 친근한 인사에 나 역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반갑게 화답했다.
“사진 찍어 드릴까요?”
그녀들은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 등나무 앞으로 조신한 숙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렌즈 속으로 그녀들을 담았다. 오로지 내 눈에만 보이는 그녀들은 예전 그 사진 속 얼굴 그대로 날 응시한 채 보랏빛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들이 선사하는 아득하고 아련한 눈매에 내 모든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도무지 그녀들의 눈빛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조종당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이 되어, 그녀들이 연결해 놓은 죽음의 실에 내 마음과 신체를 모두 구속당했다.
저 멀리서 요란한 엔진소리와 어울리는 시커먼 매연을 분사하며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 쪽을 향해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내 눈과 귀는 이미 닫혀 있었다. 마취 주사라도 맞은 듯 온몸의 신경세포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오토바이는 멈출 생각을 잊었는지, 브레이크가 고장 났는지 나와의 거리를 급속도로 좁히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은 가볍게 공중을 비행하더니 등나무 수풀숲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