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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리가 우글대는 고독의 길과 대관람차의 가르침

15

by 이현기

15. 고독의 표지판을 따라간 끝엔


가끔 완벽한 서사가 꾸며 놓은 꿈에 빠진다.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그들이

씬스틸러처럼 꿈 곳곳에 나타날 때면

꿈은 아련한 현실이 되고

과거의 추억은 다시 재현되어

그들과 즐겁게 노닥거리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날 맞이하는 건 침묵의 잿빛 천장.

낯선 현실 감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내 꿈 나들이가 끝났음을 아쉬워했다.

꿈에서 만났던

따스했던 존재들은

마치 창공 한가운데에 그려진 비행운처럼

긴 여운을 남기고 아스라이 증발했다.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탈 때마다

가끔 내 꿈속으로 그들이 찾아와 주었다.

나란한 꿈길을 정겹게 거닐다가

불청객 같은 핸드폰 알람이 비명을 지르면

미처 작별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아쉬운 헤어짐으로 꿈은 마무리되었다.

고독이 새겨진 표지판 쪽으로

방향을 튼 요즘.

나는 외로움의 돌부리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자꾸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뾰족한 돌부리는 길의 군데군데에서

드러내 놓고 방해 공작을 펼쳤다.


'넘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오롯이 네가 선택한 길이야.'

다시 예전처럼

사람이 북적이는 대로로 돌아갈까.

다시 사람들 틈으로 섞일까.

돌이키고 싶을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길의 끝에서

진짜 나를 만나고 싶다는

그 막연하고도 또렷한

욕망과 의지 때문일까.

15-1. 대관람차가 건네는 말


일 년에 한 번 꼴로 가족과 함께 집 근처 놀이공원을 방문한다. 성인보단 유아용 놀이기구가 대부분인 소규모 놀이공원으로, 아직 공포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뭔지 모르는 아들 녀석들과 공포가 주는 카타르시스 따위 내팽개쳐 버리고 싶은 아빠와 엄마가 가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몇 해 전 고등학교 수학여행 인솔 당시, 나는 에버랜드에서 호기로운 객기를 부리며 동료 선생님들과 T익스프레스를 탄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양쪽을 분주히 오가는 섬뜩한 체험을 했다. 바지가 소변으로 젖지 않은 게 참말로 다행이었다. 이후부터는 놀이공원에 갈 일이 있으면 주로 대관람차나 회전목마같이 고요히 사색을 할 수 있고 내면의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놀이기구를 탄다. 공포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그냥 공포일뿐이다.


젊었을 때 자주 어울렸던 친구들과는 세상 속에서 각자의 종족을 번식하고 정해진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느라 해가 갈수록 연락이 뜸해졌다. 나도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교제하며 나름 관계를 쌓았지만, 가족이 아닌 이상 그들과 마음을 터놓고 허울 없이 지내는 데도 엄연한 한계가 존재했다.(인간관계에서 참 많이 데어봤다...) 사이가 가깝다고 해서 쉽게 내 마음을 드러내며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간 걷잡을 수 없는 상처가 대기 번호표를 뽑아놓고 내 마음에 침투하길 기다렸다. 가족은 비교적 내편이라 하지만 그들과도 이냥저냥한 갈등으로 대척하는 걸 보면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은 결국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아닌 듯하다. 어쩌면 나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지 않을까.


실상 우리는 사회 속에서 각자의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맞춘 만들어진 가면, 타인의 눈치를 보며 만들어진 가면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철저하게 기만하고 있다. 답답해서 가면을 벗을라치면 자칫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것만 같은 두려움과 망설임이 찾아오기도 한다. 차츰 자신의 진짜 모습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대가 만들어 놓은 가면 안에 감춰져 그렇게 모두는 가면무도회에 참가한 마스크레이더(Masquerader)들처럼 서로의 베일에 꽁꽁 숨은 채로 살아간다.


가면과 가면의 만남이 아닌 진짜와 진짜의 만남을 원한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이 답답하고 지긋지긋한 가면을 벗고 진정한 동지를 만들고 싶다. 내 간절함이 절대자에게 닿았는지 마흔 줄에 들어서야 드디어 가면을 벗은 민낯의 친구를 만났다.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다. 아내에겐 살짝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내보다 날 더 잘 이해해 주는 것도 같다. 앞으로 이 친구에게 내 마음과 정성을 몽땅 쏟아부으며 가까이 다가갈 예정이다. 이름도 외자라서 왠지 개성미와 세련미도 묻어나 있다. 그 친구 이름은 바로 '고독'이다. 반갑다, 내 친구 고독아. 난 외로움이라고 해.


새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을 축하라도 하듯 얼마 전에 놀이공원에서 탑승했던 대관람차가 느릿느릿 하늘에 동심원을 그리며 말을 건네온다.


"반가워. 외로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민간인 사찰이라도 한 거야?"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내 안에 품어봐서 잘 알아. 외로운 사람, 즐거운 사람, 걱정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 등 말이지."


"하긴, 네 입장에선 사람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가 쌓였겠구나. 꽤나 전문적인 직업인 걸?"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그나저나 어때? 홀로 외로움의 길을 걷는다는 거 말이야."


"뭐, 순탄한 길은 아니지. 꽤 거칠고 궂은 길이야. 돌이키고 싶을 때도 가끔 찾아오고."


"내 얘길 들어봐. 일단 고독의 본질에 점차 접근해 가고 있는 점, 대견해. 꼴에 책 좀 읽더니 날로 성장하고 있구나. 고독에 다가서고자 한다면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늘 책을 가까이하며 때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스스로 사유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 나를 타봤다니까 하는 말이지만 나는 칸칸이 함께 돌아가고는 있지만, 결국 서로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진 채 순환하고 있지. 유기적으로 엮여 있지만 고유의 존재는 남과 동떨어진 채 움직이고 있어. 나는 관계에 대해 생각게 하는 알레고리야. 우린 고독과 가까워져야 해. 고독은 진정한 나와 만나게 해 주거든. 고요한 내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관습 속에 형성된 모습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전제거든. 외로운 사색을 즐기며 끊임없이 되물어야 해.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등을 말이야. 그러다 보면 반드시 너의 내면 깊은 곳에서 답을 들려줄 순간이 찾아올 거야. 현실이 빚어낸 인공적인 자아가 아닌, 참자아가 슬슬 모습을 드러낼지도 몰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수감자들은 혼자만의 고독의 시간과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마저 간절히 염원했음을 명심해. 함께 돌아가는 듯 보여도 각자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지. 고독이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야.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순간, 삶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이 트일 거야. 외롭다는 거, 혼자 걷는다는 것, 나쁘지 않은 일이야. 넌 정말 대단한 길을 걷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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