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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케이크가 제일 맛있는 순간과 오래된 예물 시계

14

by 이현기

14. 치즈케이크는 마음을 비웠을 때 가장 맛있다


집과 멀지 않은 곳엔

'비워두기'라는 치즈케이크 전문점이 있다.

그 가게를 스칠 때마다

저 집 치즈케이크는 맛있을까, 하는

일차원적인 물음만 맴돌 뿐

왜 가게 이름이 '비워두기'인 지는

궁금증 목록에 없었다.


그저 일에 치이고

돈에 쪼들리며

육아에 시달린 후 생긴

찌끄러기 같은 감정들은

차곡차곡 내 마음 창고에

채워두기.

난 힘듦을 열심히 채우며 살았다.


날 감싸는 모든 제반 요건들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세상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도

난 소스라치며 옴싹할 뿐이었다.


'행복은 언제 다가오는 거지?'


행복을 만지기 위해서

손을 뻗어보지도 않아 놓고

열중쉬어 자세로 뒷짐을 진 채

행복이 제 발로 다가오는 순간만을

기다려 온 나는

내 힘과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훈련소의 1주차 훈련병이나 다름없었다.


행복의 공을 잡아보는 대신

대기를 가르는 헛발질로

인생의 절반 가량을 소비했다.

지금은 전반전이 끝난 하프타임.

다가올 후반전엔

행복의 공을 굴릴 수 있을까.

기적 같은 골을 넣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맛있는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배시시 웃을 수 있을까.


14-1. 예물 시계가 건네는 말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 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2011년에 방송된 'KBS 열린 음악회'라는 TV 프로그램. 대중들에겐 다소 생소하다고 여겨질 수 인물이 무대 서 있. 장윤정을 기대했던 나이가 지긋하신 관객들의 표정은 왠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사회자의 청아한 목소리로 소개된 그의 이름은 뮤지컬 배우 홍광호였다. 뮤지컬 계에서는 실력으로 정평이 난 배우였지만, 나처럼 뮤지컬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아마 '저 사람 누구지?' 같은 생뚱맞은 반응 일색이었을 것이다. 홍광호 배우는 그 자리에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대표적인 넘버 중 하나인 <지금 이 순간>을 열창했다.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격정의 폭풍을 일으키는 데는 고작 3분이면 충분했다. 그는 기승전결이 명료한 구성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불과 3분 전까지 객석 위에 떠 있던 물음표 일색을 확신의 느낌표로 탈바꿈시켰다. 소위 말해 무대를 찢어버렸달까. 나 역시 노래를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 엉켜 있던 권태의 사슬이 모두 벗겨진 느낌이었다. 여담이지만 훗날 직장인 회식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을 목 놓아 부르다가 상사에게 멱살 잡힐 뻔했다...


우리 집엔 나만의 서재방이었다가 아이들이 태어난 후 녀석들의 엉망진창 아지트로 용도 변경된 방이 하나 있다. 방바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녀석들이 놀다가 만 온갖 레고 브릭들과 크고 작은 장난감들로 가득했다. 나는 솔직히 방을 이 정도로까지 어지럽히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아들들은 아마 아내의 성향을 닮았을 확률이 높다.(실제로 결혼 전에 아내의 방을 가 본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방의 개념이라기보다 물류 창고에 가까웠던 기억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레고 브릭이 발바닥에 박힐 때마다 따끔한 분노가 일었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청소를 결심했다. 그런데 왜 아내는 소파에서 계속 유튜브를 보고 있지?


가쁜 한숨을 몰아쉬며 청소를 하고 있노라니 눈치 빠른 아들들은 일말의 죄의식을 묻힌 기색으로 아빠의 청소를 도와주겠다며 슬금슬금 방으로 기어 들어왔다. 대견한 마음도 잠시, 녀석들은 처음에만 도와주는 시늉을 하더니 어느 순간 다시 집중력이 흐트러져 그새 아빠의 전투력을 잊고서 눈치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눈알이 빠져나올 정도로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분노의 차크라를 발산하자 아들 녀석들은 아빠 성났다며 재빠르게 줄행랑을 쳤다.


사고뭉치들을 추방한 후 청소를 재개하다가 간이 책꽂이 근처에서 낡은 가죽 시계 하나를 발견했다. 장모님이 신혼예물로 사줬던 시계였다. 수명이 다했는지 시곗 속 바늘들은 복지부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혼 시절에 썩 잘 차고 다녔던 시계인지라 아릿한 공허함이 마음 안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듯했다. 아내와의 행복했던 신혼시절을 떠올리니 육아에 찌든 요즘의 아내가 가련하게 느껴졌다. 젊었을 땐 참으로 고왔었는데 지금은 왜... 더 아름다울까...


잠시 회한에 젖어 있는 사이 멈춰버린 손목시계가 째깍거리며 말을 건네온다.


"화가 많이 나 보이네?"


"육아가 장난이 아니네. 물론 하루 종일 육아를 전담하는 아내가 더 힘들겠지만."


"그래서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해?"


"불행이라. 너무 극단적인 불행이라곤 할 수 없지만, 이래저래 힘든 건 사실이야. 직장 상사에게 깨지고, 아내의 축 늘어진 어깨가 짠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나만의 시간이 없는 등 이러저러한 것들이 말이야."


"그래서 지금의 이 힘든 순간이 후딱 지나가버렸으면 좋겠어?"


"힘든 순간이 후딱 지나가버리는 건 누구나 원하는 것 아니야?"


" 얘길 들어봐.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짧은 인생은 유한하고 이 순간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말했지. 지나버린 과거에 얽매일 이유도, 먼 미래의 불확실함에 기댈 것도 없이 우린 영원히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에 의미로운 충실함을 더해 행복하게 살아야 돼.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의 시간을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있다면 넌 아직 행복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거야. 거창할 필요 없이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아보는 건 어때? 방을 어지럽힌 두 아들은 널 화나게 한 불행의 씨앗일까, 아님 널 웃음 짓게 하는 행복의 새싹일까? 진정한 행복은 채워짐에서 오는 게 아니야. 설사 무언가 채워져서 행복감이 밀려온다 해도 장담하건대 그건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고 다시 권태에 늪에 갇혀버릴걸? 우리에겐 비우는 훈련이 필요해. 집착이 불행을 낳는 거야. 욕심을 비운다면 당연히 행복의 임계점도 낮아질 거야. 행복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거든. 비울수록 채워지는 모순이 결국은 행복의 본질이야. 잘 살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비우는 연습이 네 인생의 질을 높여줄 거야. 하루키 작가가 건넨 '소확행'의 의미를 되새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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