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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손목 시계가 내게 건네는 몇 마디

by 이현기 Jan 30. 2025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 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2011년에 방송된 KBS 열린 음악회. 대중들에겐 다소 낯선 인물이 무대에 올라올 예정이다. 사회자의 마이크를 통해 장내에 울려 퍼지는 그의 이름은 뮤지컬 배우 홍광호. 대한민국 탑 뮤지컬 배우이지만 나처럼 뮤지컬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아마 '저 사람 누구지?' 같은 생소한 반응 일색이었을 것이. 그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대표적인 넘버 중 하나인 '지금 이 순간'을 열창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격정의 폭풍을 일으키는 데는 고작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기승전결이 명료한 구성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3분 전 희미했던 물음표를 3분 후 확신의 느낌표로 바꾸었다. 소위 말해 무대를 찢어버렸달까. 노래를 듣는 순간, 내 마음속 권태의 사슬이 모두 벗겨진 느낌이었다. 정말로.


 신혼 때는 나만의 서재방이었다가 아이들이 태어난 후 녀석들의 내밀한 아지트로 용도 변경된 방이 하나 있다. 방바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녀석들이 놀다가 만 온갖 레고 브릭들과 크고 작은 장난감들 투성이다. 난 방을 이 정도로까지 어지럽히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아들들은 아마 아내의 성향을 닮았을 확률이 높다.(실제로 결혼 전에 아내의 방을 가 본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방의 관념이라기보다 물류 창고에 가까웠던 기억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레고 브릭이 발바닥에 밟힐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대적인 청소를 결심했다.


 가쁜 한숨을 몰아쉬며 청소를 하고 있노라니 눈치 빠른 아들들은 일말의 죄의식을 묻힌 기색으로 청소를 도와주겠다며 슬금슬금 기어 들어왔다. 대견한 마음도 잠시, 녀석들은 처음에만 도와주는 시늉을 하더니 어느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져 아빠의 전투력을 잊은 채 눈치 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머리털을 쭈뼛 세우며 분노의 차크라를 발산하자 아들 녀석들은 아빠 성났다며 줄행랑을 쳤다. 어지럽히는 놈들 따로 있고 치우는 부모 따로 있다. 부아가 끓었다.


 말썽꾸러기들을 몰아내고 청소를 재개하다가 간이 책꽂이 근처에서 낡은 가죽끈 시계를 발견했다. 장모님이 신혼예물로 사줬던 시계인데 지금은 수명이 다했는지 시곗 속 바늘들은 복지부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혼 시절에 썩 잘 차고 다녔던 시계인지라 어슴푸레한 회상은 희미한 상실감을 생산하여 공허한 마음 안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행복했던 신혼시절을 떠올리니 육아에 찌든 요즘의 아내가 가련하게 느껴진다. 젊었을 땐 참으로 고왔었는데 지금은... 왜 더 아름다울까...


 가녀린 회한에 젖어 있는 사이 멈춰버린 손목시계가 째깍거리는 듯이 말을 건네온다.


" 얘길 들어봐. 프리드리히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짧은 인생은 유한하고 이 순간은 영원히 반복된다고 말했지. 지나버린 과거에 얽매일 이유도, 먼 미래의 불확실함에 기댈 것도 없이 우린 영원히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에 의미로운 충실함을 더해 행복하게 살아야 돼. 지금 이 순간이란 시간성에 넌 어떤 감정을 더할 거야? 네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는 너에게 어떤 의미야? 과거에 행복했었다, 미래에 행복할 것이다, 같은 나약한 상념에 젖은 채 현재라는 시간을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있다면 넌 아직 행복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거야. 네 행복은 남의 기대감이 아닌 네가 직접 찾아나가는 거야. 거창할 필요 없이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행복을 찾아보는 건 어때? 방을 어지럽힌 두 아들은 널 화나게 한 불행의 씨앗일까, 아님 널 웃음 짓게 하는 행복의 요소일까? 진정한 행복은 채워짐에서 오는 게 아니야. 설사 무언가 채워져서 행복감이 밀려온다 해도 장담하건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지. 하지만 네가 스스로 발견한 행복감은 오랜 시간 네 마음 안을 환하게 밝히면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거야. 삶의 질이 혁신적으로 달라지는 거지. 무엇보다 넌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행복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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