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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비렁뱅이와 데미안의 장작불

12

by 이현기

12. 감정을 구걸하는 비렁뱅이


무섭게 이글거리는 불꽃 속으로

느닷없이 손을 뻗은 대가는

짓무른 화상으로 돌아왔다.

관계가 빚어낸 마음의 화상.

꽤나 고통스럽고 진물이 나는

징그러운 자국이

내 영혼을 흉측한 무늬로 장식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상당히 중독적이다.

남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

한 번 맛보면 쉽게 끊기 힘들다.

남들에게 공감받고 싶은 욕구

우군이 생긴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진다.


나는 내 감정의 주도권을

온전히 남에게 내맡긴

감정의 피지배인이었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내가 나를 공감하지 않고

그저 남에게 감정을 구걸할 뿐이었다.

감정의 거지, 감정의 비렁뱅이.

난 언제나 남루한 감정의 옷가지를 걸치고 살았다.


'넌 왜 네가 만들어 가는 영화에서 굳이 조연을 자처하는 거야?'



이 세상은

나라는 인물의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법인데

나는 그동안

주인공 자리를 정중히 내팽개치고.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돌변하여

타인의 비위만 맞추며

살아온 건 아닐까.

남에게 모든 걸 의존하면서.


12-1. 장작불이 건네는 말


어렴풋한 감각이 남아 있는 기억이지만 초등학교 취학을 몇 해 앞둔 어느 무렵, 연탄불에 오른손을 데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뜨겁고 공포스러운 감각이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놀란 마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장면이 가물거린다. 요즘에야 집 가까운 약국에서 화상 전용 연고를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당시 어머니께서는 덴 손에 소주를 뿌려주는,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으로 응급 처치를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상태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느낌이 들었다.(실제로 화상에 알코올을 뿌리는 건 잘못 알려진 민간요법이라고 한다... 아, 어머니... 왜 그러셨...) 하필 한글을 막 익히던 시절이었고 덴 손이 글씨를 쓰는 손이다 보니 한동안 글씨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의 글씨와 견주어 봐도 내 글씨체는 한글이라기보단 아랍어의 필체에 가까웠다. 붓글씨를 기가 막히게 잘 쓰시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과연 내 아들이 맞나?', 하며 친자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시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손가락 마디가 꺾이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온 끝에 칠판 판서를 썩 잘할 만큼 글씨체가 많이 개선된 상태이다. 적어도 갓 글씨 연습을 하고 있는 여섯 살배기 둘째 아들보단 글씨를 잘 쓴다고 자부한다...


한때 인간관계의 양적인 측면에 집착했었다. 내 곁에 사람을 얼마나 두느냐를 건강한 관계성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많은 사람을 자주 만나면서 내 편을 하나씩 만드는 일은 마치 무형 자산을 불리듯 즐거웠고 관계의 몸집을 불릴수록 자족적인 안도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서사의 자서전을 써 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데에는 어느 정도 부작용도 있었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의 성정과 기대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골프에 관심이 없었지만 직장 동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덩달아 골프를 배워야 했고, 평소 투자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투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의 이야기에 격렬하게 호응해 주며 유별난 관심을 드러냈다. 나아가 비속어를 남발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역시 상대방과 같은 결의 비속어로 짓까불고 있었다. 남들의 색깔에 맞추어 살았던 결과, 나만의 고유한 본질은 점차 허섭스레기가 되어 갔다. 견고한 신뢰 속에 구축된 관계성이 아닌지라 악의 없는 서툰 언행에도 서로 상처와 오해가 갈마들었다. 급기야 관계의 줄이 끊어지는 경우마저 있었다.


문득 유치한 발상이 떠올랐다. 불현듯 사람들과 만남이 이루어진 건 대부분 나의 연락을 통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그동안 나는 사람들에게 만남을 구걸했던 건 아닐까? 내가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 나한테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취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인생의 중요한 변환점이 될 수도 있어서 추레한 시험을 해 보기로 했다. 진정한 내 편과 옥석을 가려 보기로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린아이 같이 미숙한 생각이다.


몇 개월에 걸친 실험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말 내가 필요해서, 나를 만나고 싶어서 내게 먼저 연락을 취한 지인은 그 많던 사람 중에 고작 서넛 정도였다. 꾸준하게 주기적으로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감정의 깊이를 더해간 사람들도 내가 먼저 만나자는 제안을 건네지 않은 이상, 그 누구도 나를 먼저 찾는 일은 없었다. 기대 이하의 비참한 결과물을 받아 들고 난 후 극단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난 그동안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의 자의적인 요구로 그들의 소중한 저녁 시간을 뺏은 가해자라는 걸. 당시에는 관계의 벼랑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참담한 심정이었다.


관계의 갈림길에서 갈팡지팡하다 결국 관계 디톡스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워낙 사람 냄새 맡기를 좋아하는지라 관계의 독소를 덜어내는 작업은 비단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일상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 직장 동료나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혹자는 그럴 때는 가족이 있지 않느냐며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난 부모님이나 아내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 내 신상의 안 좋은 일엔 입을 닫는 편이다. 그 많던 관계를 끊으니 슬금슬금 내 마음의 공백은 커져갔고 환절기 새벽바람처럼 고독과 공허함이 공백을 채웠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다 보면 주인공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대신하여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준 피스토리아스가 나란히 앉아 불멍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는 변화무쌍하게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면서 배화(拜火)를 떠올리며 한없는 사유의 세계에 빠져든다.


소설의 한 페이지 속, 관념이 타닥거리는 것만 같은 장작불이 관계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나를 향해 사유의 불꽃을 일렁이며 말을 건네온다.


"외롭고 허망하지?"


"뭐가?"


"인간관계 말이야."


"쯥, 그렇지 뭐. 여태 내가 그들에게 거지처럼 적선을 바랐던 것 같기도 하고."


"아이고, 이 친구야. 지금은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은 미래를 꿈꿔야 할 때야. 관계에 상처받았던 나날들이 모였기에 지금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거라고. 모르겠어? 지금의 관계에 대한 고민들이 너의 삶의 질을 풍성하게 변화시켜 줄 것이란 것을."


"너무 어려워. 쉽게 말해 줘."


"내 얘길 들어봐. 불을 따스함으로 감각하려면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법이야. 춥다고 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간 자칫 타거나 델 수 있고, 그렇다고 너무 불에서 멀어지면 불의 온기를 오롯이 느끼기 어렵지.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적당한 거리 유지가 관계의 핵심이지. 오히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욱 이 원칙을 지켜나가는 게 필요해. 이왕 말 나온 김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괜스레 무의미한 농담이나 주고받고 널 위하는 척 걱정해 주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너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 네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나가길 바라. 애써 관계를 붙잡으려 애쓰지 말고 사람들이 자연스레 널 따라올 수 있는 영향력과 인품을 기르는 게 중요해. 넌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잠재돼 있어. 자신의 그릇보다 넘쳐나는 돈은 오히려 근심거리가 되듯이, 넘쳐나는 관계 역시 너에게 괜한 걱정거리로 작용할 수 있거든. 꼭 필요한 양만 담아내는 효율적인 그릇이 되길. 다른 사람들과 쌓아나가는 관계에만 치중하지 말고 네 안에 있는 너의 진짜 자아와 만나는 시간을 조금씩 확보했으면 좋겠어.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말이지. 기대되지 않니? 여태껏 숨어 있던 너의 진짜 본질을 조우할지도 모른다는 그 미래적 예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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