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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보스 정벌 실패와 책 좀 읽은 종려나무의 관조

11

by 이현기

11. 절대 죽지 않는 최종 보스의 이름은


불행은 비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나보다 잘 생긴 타인.

나보다 돈 많은 당신.

나보다 능력이 출중한 그대.

나보다 잘 사는 것만 같은 모두들.


학교 교육이 부지불식간에 심어놓은

경쟁이라는 구시대적 메모리칩은

블루오션이든 레드오션이든

늘 우리를 초조와 긴장의 바다에 던져놓고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재촉한다.


나는 그냥 나일뿐인데

마치 가상현실 속 게임 캐릭터처럼

어느샌가 나도 모르는 능력치가

부여되어 있다.

날 관찰하고 평가하는 그들에 의해서.


업무 능력 72

관계성 76

인성 81

재력 53

외모 29


내 능력치를 높이기 위해선

그들이 만들어놓은

퀘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열심히 사냥을 해서

진귀한 아이템을 착용하고

특수 스킬도 여러 개 얻어

어둑한 동굴 같은 현실을

용감무쌍하게 헤쳐나가야 한다.


동굴의 가장 방에선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음습한 방엔

최종 보스가 여유로운 자세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보스를 토벌하면 획득할

진귀한 아이템을 기대하며

나는 무작정 돌진했다.

그. 러. 나.


아무리 부지런히 칼을 휘두르

화려한 마법을 써도

최종 보스는 넘어지기는커녕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내 체력과 마력은 계속 깎이는데

최종 보스의 체력은 오히려

내 체력을 흡수하며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도무지 쓰러지지 않는 너는 정체가 뭐야?'


내가 거즘 쓰러질 때쯤

최종 보스의 머리 위로

몬스터 이름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존재의 네임드명은

'꺼지지 않는 열등감'이었다.

11-1. 종려나무가 건네는 말


종려나무를 아시는지.


종려나무란 온대성 야자수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엔 왜종려나 당종려 같은 키 작은 품종이 보급되어 주로 따뜻한 남쪽 지역에서 정원용이나 관상용으로 쓰인다. 나무 자체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풍기다 보니 수요가 있어 조경수를 생산하는 농장에서 직접 가꿔 굴취, 납품하기도 한다.


성경에도 자주 나오는 종려나무는 뜨거운 사막에서도 뿌리를 내린다. 강풍이 불어닥쳐도 구부러질지언정 절대 쓰러지는 법이 없고, 그루터기를 불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올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이다. 나무 길이는 품종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줄기는 보통 3미터에서 10미터 정도 자라고 뿌리는 땅속에서 대략 100미터 이상까지도 뻗어나간다 한다. 이러니 태풍이 와도 끄떡이 없겠지. 심지어 대추야자라는 열매까지 맺으니 사막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만큼 실용적인 나무는 없지 않을까? 강풍을 막아주고, 그늘을 선물하고, 거기다 먹거리까지. 이참에 나도 단독주택으로 이사해서 정원에 종려나무나 심어볼까? 과연 나와 아내는 정원을 잘 관리할 수 있을까? 발코니에 널브러진 화분들을 보아하니 그럴 리는 절대 없을 것 같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행복한 날과 불행한 날이 교대로 찾아들기 마련이다. 햇빛 찬란한 날이 있는가 하면 궂은비가 오는 날이 있듯이 말이다. 누구든지 지난 인생을 찬찬히 돌아보고 삶의 굴곡 그래프를 그려보면 마치 높은 산의 산등성이 모양으로 들쑥날쑥한 선이 그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허리를 못 세웠던 아기가 점차 허리를 곧추세우고, 이후 나이가 들면 다시 자연스레 허리가 굽듯이 어쩌면 인생의 굽이란 세상을 창조한 신이 인류에게 겸손함을 가르치기 위해 예비해 놓은 숙명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불행이 반드시, 언젠가는 찾아오는 것이라면, 중요한 사실은 불행에 대처하는 자세일 것이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겹겹이 쌓으며 불행한 상황을 더 키우느냐, 혹은 확고한 의지로 그것을 과감히 떨쳐내고 다시 일어서느냐의 문제인데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전자의 방식을 택하고 있지 않나 싶다. 불행한 상황 자체에 잠식되어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걱정, 근심, 초조함이라는 감정에 지배되어 버린다면 불행은 더욱 힘을 받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된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의 걱정은 존재하지 않듯이. 누가 봐도 후자의 방식이 지혜로운 방법이겠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다들 수긍할 것이다. 불행을 아무 일도 아닌 듯이 과감하게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분명 그런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구원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와 더불어 제11회 교보문고 출판 어워즈의 올해의 작가상을 공동수상한 고명환 작가를 아실는지. 그의 근황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저 과거에 활동했던 개그맨이나 배우쯤으로 알고 있겠지만, 그는 현재 성공한 사업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인기 많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개그맨이자 배우로 눈코뜰 새 없이 살았던 그를 변화시킨 건 어느 날 불현듯 일어난 하나의 불행 때문이었다. 2005년 겨울,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그가 타고 있던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며 트럭을 받은 후 중앙분리대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갈비뼈 및 광대뼈가 골절되고 뇌출혈 증세까지 나타나 소생하기 힘들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다시 한번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이후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독서에 탐닉, 2010년께부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몇 천권의 책을 읽으면서 지식과 지혜가 비약적으로 자랐고 지금은 사람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인생 멘토로서의 길을 새롭게 개척하고 있다. 전화위복의 구체적인 실례이다.


교통사고라는 불행을 인생의 행운으로 전환시킨 그의 인생은 나에게도 눈이 번쩍 뜨이는 시사점을 던져줬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허황된 욕심에 눈이 멀어 성급하게 빚투를 하다 쫄딱 망해 봤던 나. 그 빚이 도대체 뭐라고 매일매일 죽음의 난간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휘청거렸던 나.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확실함으로 단정 짓고 매일의 나날을 불안정함 속에 허덕이던 나. 언제나 남들의 재력과 삶의 제반 사항들이 마냥 부러웠던 하찮고 하찮았던 나.


어느 날 카페를 방문하니 실내에 몇 그루의 종려나무가 드문드문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가지마다 부채 모양의 잎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종려나무가 손가락을 닮은 잎사귀를 악수하듯 내밀며 말을 건네 온다.


"어이, 거기 나약한 인간."


"지금 나를 말하는 건가?"


"그래, 너. 네가 카페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실내 공기가 축 꺼지는 느낌이야. 잎사귀가 시들 것만 같아."


"거, 날 언제 봤다고 초면부터 말이 되게 심하네. 잎사귀가 시들기 전에 몽땅 뽑아 줘?"


"불행하다고 생각하잖아. 네 인생에 대해서 말이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휘청거리잖아. 안 그래?"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너의 걸음걸이, 표정, 그리고 말투. 그 모든 것에 담겨 있는 걸. 난 자연의 순수한 일부로써 느낀 대로 말한 것뿐이야. 일종의 직관이지."


"자연의 순수한 일부... 가 보기엔 내가 정말 그래 보여?"


"내 얘길 들어봐. 개미에게 근면을 배우고, 개미늘보에게서 느림의 미학을 배우듯 자연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하나의 소우주와도 같지. 사람들이 나의 겉모습만 보고 내 안에 감춰진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난 사막같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땅속 깊이 뿌리를 뻗치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비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릴지언정 절대 뽑히지 않아. 나의 감춰진 본질은 바로 굳건함이야. 불행을 빠른 시간 내에 극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마음밭에 단단하고 억척스러운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 있어. 난 줄기의 10배 정도의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불행이 불어닥쳐도 버틸 수 있어. 얼핏 보니 네 키는 182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네 마음의 키를 1,820미터쯤 뿌리내린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지닐 수 있을 거야. 걱정은 괜한 불안만 키운다고. 막연한 불안 의식으로 재단한 세계에 갇혀 허우적대지 말고 성장을 위해선 마음의 중심을 다잡은 후 네 삶의 패턴을 과감히 변화시키는 거야. 낙천적인 사람이 아닌 낙관적인 사람이 되길 바라.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하는 기시미 이치로 씨가 지은 책 제목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변화란 외적인 상황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결국 현실을 직시함에서 비롯되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찰나의 화려함을 가진 벚나무, 목련나무, 배롱나무 등에 마음 뺏기지 말고 너라는 고유한 나무를 묵직하게 키워나가길 바라. 인생이란 대지 아래 누구도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강인한 뿌리를 깊게 내리길. 언제나 널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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