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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빵이라 부르는 빵이 있다.
난 공갈빵을 볼 때마다
개연성 있는 연상 작용 끝에
질소 과자를 떠올린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속은 비어있는
허풍의 알레고리.
공갈 인생이라고 부르는 인생이 있다.
입으론 그럴싸하게 삶을 포장하지만
결국 내면은 텅 비어있는
속 빈 강정 같은 삶.
나의 공허했던 지난 나날들이 그랬다.
터덜터덜 어깨가 축 처진 퇴근길.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만두 찌는 내음새.
배고픈 후각은 내 걸음을 재촉하여
자성처럼 만두 가게 앞으로 구둣발을 이끌었다.
갓 찐 고기만두 한 팩과
김치 만두 한 팩을 샀다.
수제 만두의 만두소에선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이
육즙처럼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두런두런 만두를 나눌 때
내 미각은 달콤한 육즙에 갇혀
황홀경에 빠졌다.
'너의 꿈 안엔 무엇을 채웠어?'
만두소가 꽉 찬 만두를
걸신들린 듯 우적대며
빈약하기 그지없는
내 꿈의 소를 떠올렸다.
그동안 내가 빚어온
나만의 꿈의 소는
너무나 빈약하고
하찮은 재료들로 넘쳐나
씹을 거리도 없는
씹어도 육즙 따위 흘러 나오지 않는
퍽퍽하고 건조한 만두소에 불과했다.
도대체 난 그동안
뭘 빚어 왔던 것일까?
어느덧 겨울이다. 지상으로 낙하 운동을 하는 눈은 대지의 포근한 품에 희멀건 색감을 덧입힌다. 눈이 내리는 정경은 추운 계절의 평범한 현상이지만, 각자의 머릿속에 장착한 주관적 관념의 틀에선 눈의 의미는 저마다의 의미로 새롭게 정의된다.
"눈이요? 많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어요. 눈사람을 만들 수 있고 눈싸움도 할 수 있잖아요. 눈은 하늘이 주는 선물 같아요."(눈사람 만들 생각에 들뜬 초등학생)
"눈이요? 이젠 정말 징글징글하네요. 눈은 하늘이 땅에다 내다 버리는 쓰레기일 뿐이에요."(전방에서 제설 작업으로 고생한 이력이 있는 군필자)
"눈이요? 후, 얼마나 내린대요? 하늘이 원망스럽네요. 내일은 새벽부터 서둘러야겠어요. 간밤에 많이 쌓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던가 해야지. 휴."(눈길에 지각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직장인)
내게도 눈의 의미는 일종의 낭만으로 태어났다가 쓰레기로 변질된 후 걱정거리로 종착되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의 눈이 개츠비적(Gatsbyesque) 유희 거리였다면, 전방에서 복무하던 군인 시절엔 그악스러운 하늘이 지상을 향해 무단으로 투기하는 쓰레기였고, 자차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시절엔 출근길 바쁜 발목을 꽁꽁 부여잡는 짓궂은 브레이크와 같았다. 해가 갈수록 순백의 낭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낭만이 빠져나간 공허한 자리엔 냉랭한 현실 감각만이 메꾸고 있었다.
기술의 발달과 실용주의적 사고의 확산은 눈놀이 도구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맨손으로, 혹은 장갑을 끼고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덩이를 모아 조잡한 눈사람을 만들거나 동무들과 잡아먹을 듯 눈싸움을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요즘은 눈집게라는 장난감이 출시되어 아이가 있는 가정마다 겨울철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세상을 향해 뛰쳐나온 동심들의 손에 필수품처럼 들려 있는 눈집게. 우리 집에도 똥 모양, 헬로우 키티 모양, 오리 모양 등 다양한 눈집게가 봄여름가을 동안 베란다 구석에서 먼지팩을 하고 있다가 겨울이 찾아오면 슬금슬금 존재감을 어필한다.
눈다운 눈이 내린 겨울의 한 자락. 아들 녀석들의 끈질긴 성화에 못 이겨 베란다에서 나뒹굴던 눈집게를 끄집어내어 눈밭으로 위장한 아파트 놀이터로 진격했다. 녀석들은 눈집게를 몇 번 놀리더니 이내 흥미가 떨어졌는지 그마저 내팽개치고 눈덩이를 만들어 그들만의 쫓고 쫓기는 눈싸움 추격전을 시작했다. 눈싸움에 쓸 기력과 낭만이 사라진 나는 눈이 적당히 모여 있는 한 곳에 자리를 깔고 하얀 똥, 하얀 헬로우 키티, 하얀 오리를 생산하는 데 나름의 재미를 붙였다. 초반에는 별다른 힘을 주지 않고 눈틀에 눈을 모으는 데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애써 만든 작품들은 금방 바스러지기 일쑤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눈집게에 악력을 바싹 모아 눈을 꾹꾹 눌러 담으니 그제야 꽤 견고한 작품이 하나둘씩 공산품처럼 생산되었다.
그 사이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각자의 눈덩이를 들고 숨 막히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내 손바닥 위엔 단단하게 만들어진 똥 모양 눈덩이 하나가 올라와 있다. 쥐어 보니 왠지 던지면 잘 날아갈 것 같은 믿음직한 밀도감이 느껴진다. 형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는 둘째 녀석의 등을 향해 적당한 힘으로 똥을 던진다. 하얀 똥덩이는 슬라이더의 궤적을 그리며 둘째 녀석의 등짝 한가운데 정확히 명중한 후 부서진다. 예기치 않게 눈덩이를 맞은 둘째 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난 태연한 얼굴로 검지를 펼쳐 첫째 아들 쪽을 가리킨다. 둘째 녀석은 씩씩대며 형을 잡으러 내달린다. 난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눈집게에 눈을 차곡차곡 모아 첫째 녀석을 맞출 오리 모양 똥을 만든다.
묵직한 눈덩이로 둘째를 타격하는 데 성공해 우쭐해 있는 내게 눈집게가 추운 입김을 뱉으며 말을 건네 온다.
"너무 유치한 거 아냐? 어른이 돼서 형제 사이를 이간질시키다니."
"세상이란 온통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준 거지... 조기 교육 차원에서."
"본디 어른이란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지켜주는 존재야. 이 철없는 어른이 아저씨야."
"너무 잔소리만 해대는 거 아니야? 어른도 때론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고."
"웃겨."
"뭐가?"
"넌 어린 시절에 품었던 소중한 꿈덩이를 산산이 부서뜨렸잖아."
"계속 손에 쥐고 있기엔 너무나 차가워서, 혹은 너무 무거워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놓쳤었나 봐."
"내 얘길 들어봐. 밀도가 높은 물체는 질량도 무거워지는 건 알고 있지? 너의 흩어진 꿈의 조각들을 모아 꾸욱꾸욱 눌러 밀도가 높은 꿈덩이를 만든다면 그 꿈덩이의 질량도 덩달아 무거워지는 거지. 여기저기 흩날리는 눈발들을 봐봐. 밀도가 낮고 질량도 가벼운 눈은 가벼운 바람에 휘청이며 결국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미지의 곳에 닿았다가 소멸되고 말겠지. 하지만 눈발들이 하나둘 모여 결집하기 시작하면 그 밀도와 질량은 어마무시하고 거대한 눈더미가 돼. 연약한 줄 알았던 눈이 단단한 눈더미가 된다는 사실에서 우린 뭔가를 깨달아야 해. 이제 다시 너희 흩어진 꿈의 조각들을 쓸어 모을 때야. 그 조각들을 희망과 의지의 집게 안에 넣어서 꾹꾹 눌러 담아 봐. 가슴 벅차오르는 고밀도 고중량의 꿈 더미가 탄생할지 누가 알아? 내 말을 잔소리라고만 생각하진 말아 줘. 난 누구보다 너의 꿈을 응원하며 네가 높은 바위 위에 오르길 염원하는 존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