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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Dec 19. 2024

 내 삶의 인플루언서가 되는 방법

볼펜똥이 내게 건네는 몇 마디

 볼펜도 똥을 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유성 볼펜 끝에는 획을 그을 때마다 회전하는 작고 동그란 쇠볼이 붙어 있어 볼이 굴러간 자리엔 잉크가 족적을 남긴다. 이때 볼에 붙어 있던 유성 잉크 덩어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일명 볼펜똥이라 부른다. 볼펜에 자를 대고 밑줄을 긋거나, 볼펜 사용각을 가파르게 하면 심심 않게 볼펜똥을 만나볼 수 있다. 볼펜똥이 주는 너저분함이 싫은 사람은 수성 볼펜을 쓰면 되지만, 난 개인적으로 똥을 싸지르는 유성 볼펜이 더 인간적(?)이라 생각해 단출한 정감이 간다.


 임용 고사 준비에 정력과 정심을 쏟았던 사범대학교 4학년 시절. 밑줄 긋기와 귀퉁이 메모가 임용 고사 합격의 스모킹 건(smoking gun)이라고 여긴 탓에 두꺼운 전공 서적에 일일이 밑줄을 그어가며, 깨알 메모를 정성스레 끄적이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다행히 책이 타는 불상사는 없었으, 흉물스러운 볼펜똥은  군데군데에 자신의 흔적과 정체성 잔망스럽게 남겼다. 볼펜똥이 나올 때마다 볼펜촉을 일일이 화장지에 닦아내는 은 붓글씨를 쓰는 만큼이나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오래 해서 인지 구조가 잠시 뒤틀렸는지 불현듯 볼펜똥으로 분출되는 잉크가 아깝다는 기괴한 상념이 찾아왔다. 볼펜똥도 엄연한 잉크이기에 마치 자동차 기름이 새는 것 같은 낭비적 느낌이랄까. 볼펜똥을 효과적으로 재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볼펜똥으로 그림을 그려보자는 다소 치기 어린 결론에 이르렀다. 수험생의 폐쇄적인 삶에 찾아오는 사소한 즐거움이란 종종 유치한 발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일단 두루마지 휴지 두 칸을 떼어서 절취선을 따라 반으로 고이 는다. 그다음 휴지 위에 연필로 그림의 도안을 스케치한다. 그러고 나서 도안의 공백을 볼펜똥으로 한 점 한 점 채워나가다 보면 꽤 그럴싸한 볼펜똥 아트가 탄생한다. 볼펜똥으로 만들어낸 첫 작품은 함초롱바탕체에 가까운 '합격'이라는 글자였다. 이후 장미, 별 등 합격의 기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물들을 모조리 그려 나갔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들은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하여 정독실 책상 벽면차곡차곡 붙여 놓았다. 어느새 책상 벽면은 볼펜똥 아트 갤러리가  되었고  마음속에선 시시껄렁한 만족감이 잉크처럼 번져나갔다.


 책상의 볼펜똥 작품들을 발견한 사람들이라면, 공부를 많이 하더니만 단단히 미쳐가는구나, 라며 동정 섞인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엄연히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때는 재수(두 번의 시험)는 없다는 확고함으로 미친놈처럼 공부했던 시절이었으니 미친놈 취급을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봐도 그때 난 미친놈에 가까웠다. 미치지 않고선 미치지 못하니깐(不狂不及).

 

 볼펜똥 생산량과 학업 성취도 향상 사이의 긴밀한 상관성을 하나의 테제로 설정하여 종래엔 증명되리라 철석같이 믿었건만, 한편으론 내 삶의 고갱이가 전공 서적 속 내용 온전한 이해가 아닌, 볼펜똥의 기계적인 생산에만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서늘음습한 불길함이 찾아왔다. 또한 갈수록 완성도가 더해지 볼펜똥 그림들은 일종의 스탕달 증후군마저 낳았다. 그림이 주는 황홀경에 빠져 전공 서적을 보면서도 틈틈이 그림에 시선을 뺏겼으니 말이다. 사범대가 아닌 미대를 갔어야 했나?  그리긴 잘 그렸...


 이러다 임용 고사 합격도 하기 전에 정신 병원으로 끌려갈 것 같아 결국 볼펜똥 그림을 모두 폐기처분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활자가 그리는 세계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정신을 너무 늦게 차렸던 걸까. 그해 임용 시험에서 아주 미세한 차이로 쓰디쓴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단단한 수박을 쪼개 시원 달콤한 과육을 맛봤어야 했지만, 나는 그동안 수박 껍질만 날름날름 핥은 격이었다. 나날이 늘어나는 볼펜똥 그림은 압도적인 공부량의 과시가 아닌, 내 어리석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보다 잘 갖추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들은 비싼 옷, 비싼 차. 비싼 집 등으로 현생의 삶을 멋들어지게 치장한다. 물론 그들이 비싼 걸 사든, 싼 걸 사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단지 학교에서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패딩을 걸치고 다니는 학생을 목격할 때면 가끔 처연한 마음이 반갑지 않게 찾아오곤 한다.


'저 패딩 살 돈이면 서재에 가볍고 성능 좋은 노트북 한 대쯤 들여놓을 수 있을 텐데.'

'저 패딩 살 돈이면 책장 1단에서 5단까지 빳빳한 새책으로 채울 수 있을 텐데.'

'저 패딩 살 돈이면 도대체 살치살이 몇 인분이야?'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 때면 열등감에 잠식되기 전에 재빨리 성경의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을 소환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 구절을 마른 장작 삼아 불이 꺼져 가는 머릿속 스토브에 쑤셔 넣는다. 읽고 있던 책을 꺼내 들어 책날개로 가름한 페이지를 소중히 펼친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니깐 책이라도 탐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독서에 탐닉한다. 활자 하나하나, 의미 하나하나가 나의 자산이라는 심정으로. 어느새 스토브의 불길이 거세진다.  


 내 손에 쥐어진 낡은 모나미 153 볼펜이 물질적 열등감과 정신적 승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를 향해 잉크향 입냄새를 풍기며 말을 건네온다.


"내 얘길 들어봐. 난 네가 피상적인 것에 얽매여 본질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 남한테 잘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야 돼. 물질에 대한 노예근성은 과감히 버려. 너가 물질을 좇는 게 아니라 물질이 널 따라오는 삶을 살아야 돼. 외제차? 비싼 옷? 그런 걸 타거나 걸치면 남들 눈에 띄기야 하겠지. 어렴풋한 선망의 눈빛도 받으면서 상대적 우월감이나 은밀한 만족감도 느낄 수 있을 테고 말이야. 문제는 그러한 감정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라 얼마 지나면 귀신같이 사그라든다는 점이지. 네 삶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네 자신이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인생이 아니라, 너라는 정체성을 점차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방향성이지. 달걀도 겉만 보고서는 그게 삶은 달걀인지 날달걀인지 알 수 없듯이 우린 겉이 아닌 안을 들여다봐야 해. 타인과의 sns 소통에만 열을 올려 온갖 잘난 척, 있어 보이는 척하는 사진들만 업로드하지 말고 내면 채널에 너만의 비밀 플랫폼을 개설해서 그곳에 너의 꿈의 흔적, 흔들리지 않는 비전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거야. 보이는 외형이 아닌 너의 내면을 아름답게 수놓길 바라. 온갖 희망적인 감정들이 너를 팔로워 하면 넌 네 인생이란 시간과 공간에서 유명한 인플루언서(많은 팔로워를 보유하여 영향력이 있는 사람)가 되는 거지. 볼펜똥이 아닌 볼펜이  가는 인생 노트에 집중하길. 때론 중요한 내용엔 밑줄도 그어 가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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