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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쟁이 바람의 심술과 오심투성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6

by 이현기

6. 바람은 변덕쟁이다.


신화적 존재나 창조주도 아니면서

인생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길 바랐던 나는

주제 파악을 못하는 철부지이거나

염치없는 철면피였다.


대한민국은 양궁 강국이라고 하던데

신궁의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내가 쏘았던 화살은 왜 늘

목표로 삼았던 과녁을

어긋버긋 빗나가는 것일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어대는 바람은

늘 내 화살의 탄도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놓곤 했다.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라는

어느 영화 속 명대사는

나에겐 그저 허울 좋은 판타지에 불과했다.


'일정하게 부는 바람은 존재하지 않아.'


느낄 순 있으나 보이지 않는 바람.

끊임없이 변하는 강약과 풍향.

변칙과 무질서함.

이게 바람의 속성인 줄

그리고 인생의 본질인 줄

깨닫게 되기까지는

셀 수 없이 많은 바람이

내 삶의 옷깃을

시리게 스친 후였다.


6-1. 사인볼이 건네는 말


커밍아웃이란?


1. 성소수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2. 자신의 사상이나 지향성 등을 밝히는 행위.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사적 취향 한 가지를 당당히 커밍아웃하고자 한다. 야구를 좋아하고 기아 타이거즈 팬이다. 최강 기아를 위해! 승리의 노래를 불러라! 야구장에 가서 승리의 노래를 목이 쉬어라 불렀지만 2025년은 호랑이들이 8위에 머물면서 포스트시즌에 탈락했다.


이야기는 겨울에 눈 구경하기도 힘든, 따뜻한 남쪽 나라 순천시에 살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었던 아버지는 가끔 125cc 오토바이에 짐짝처럼 나를 태우고 지방도로의 칼바람을 뚫으며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광주 무등 경기장으로 직관을 다니곤 했다. 그땐 어려서 인지하지 못했지만 오토바이를 직접 몰고 왕복 너덧 시간 가량을 달려 야구를 관람하고 온다는 건 웬만한 열혈팬이 아니고선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고역이지 않았을까. 호랑이띠에 태어난 아버지는 그만큼 호랑이의 맹렬한 야구를 사랑했다.


이와 같은 조기 교육 탓에 나도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야구 세부 규칙과 선수들의 성적, 팀 순위 등을 구체적으로 외우고 다닐 정도로 야구는 내 삶의 원그래프에서 적지 않은 비율을 점유했다.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이지만(이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CM송을 흥얼거린다면... 여러분의 나이는...) 아무래도 타이거즈를 향한 코 묻은 팬심은 홈런볼과 브라보콘 등 해태 제과 제품으로 향했다. 소비지향적 서포터로서의 지극 정성이 선수들에게도 닿았을까? 굳이 애간장을 태우지 않아도 해태 타이거즈는 승리하는 날이 잦았다. 약간 과장을 얹자면 선동열 선수가 던졌다 하면 아웃, 이종범 선수가 쳤다 하면 안타. 그야말로 무적 타이거즈 왕조 시절이었다.


스무 살부터는 그나마 눈다운 눈을 구경할 수 있는 광주광역시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 자취집이 무등 경기장과 도보로 3, 40분 거리인지라 대학 동기들과 야구장 직관을 가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당시는 무적의 해태 타이거즈가 아닌 동정의 기아 타이거즈로 바뀐 후였다. 선동열 선수와 이종범 선수가 없는 타이거즈는 호피옷을 걸친 고양이마냥 비실거리며 성적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5번 직관을 가면 아마 3,4번은 졌던 걸로 기억한다. 성대가 터져라 응원해도 쳤다 하면 아웃, 던졌다 하면 안타를 맞으며 대패하는 날이 빈번했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대투수라는 별명을 가진 기아 타이거즈 양현종 선수도 이땐 신인이었고 패색이 짙은 경기에서 패전처리조로 투입되어 볼넷과 피안타를 남발했었다. 승리를 향한 간절한 염원은 선수들의 공과 배트에 전혀 닿지 않았다.


비만 내리면 물방개가 제집 행세를 하던 추억의 무등 경기장은 어느덧 낡은 기억의 저편으로 참방대며 건너가고 지금은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라는 최신식 구장이 들어섰다. 더불어 비디오 판독 시스템(VAR)이라는 게 도입되어 비디오 판독관을 통해 오심이 현저히 줄어들어 공정한 경기 진행이 가능해졌다. 비디오 판독 시스템이 없었던 과거엔 심판의 재량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되어 티브이 중계 화면상으로 봐도 명백한 오심인데도 현장의 심판이 내린 판정이 뒤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심에 격분한 감독이나 선수가 심판에게 몸통박치기를 하며 격렬히 항의하다가 수도 없이 퇴장을 당했고 그날 경기의 흐름을 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벌이는 격렬한 벤치클리어링은 야구 관람의 묘미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는 게 아쉽다... 무릇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 죄송합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한국 야구 대표팀은 베이징의 우커숭 구장에서 쿠바 야구 대표팀과 영영 회자될 결승전을 치렀다. 한국 대표팀은 3대 2로 앞선 9회 말 수비 때 주심의 애매한 볼판정이 이어져 1사 만루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선발 포수였던 강민호 선수는 심판의 볼판정에 가벼운 이의를 제기했고 주심은 바로 그 자리에서 퇴장 명령을 내린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강민호 선수가 화를 주체하지 못해 포수 장비와 글러브를 바닥에 내동댕이칠 만큼 심판의 볼판정은 누가 보기에도 석연찮은 부분이 다소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교체된 정대현 투수는 본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주특기인 싱커볼로 상대 타자로부터 병살타를 유도해 드라마틱한 우승을 걸머진다. 오심이 있었기 때문에 감동은 더욱 배가 되었고,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는 걸 보여준 경기였다.


내가 브런치스토리에 쓰고 있는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참신하다, 짜임이 있다, 라며 긍정적인 평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유치하다,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 라면서 가치절하를 하기도 한다. 물론 내 글의 수준이 높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INFJ는 그런 반응에 일일이 맘이 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오기가 생겼다.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의 말을 오심 정도라 여기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오심 판정을 뒤엎을 정도의 내력을 쌓기로 결심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100명 중에 51명만 찍어도 대통령이 되는 시대이고 양이 있으면 음도 있듯이 나머지 49명의 반대는 어찌 보면 세상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균형 감각인 것이다. 실패 없는 성공이란 없고 비판 없는 발전도 없듯이 나를 향한 비판은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하면 그뿐이다. 오기를 심어준 오심에 오히려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 지인이 기아 타이거즈 김도영 선수에게 사인볼을 받았다며 자랑하듯 인증 사진을 보내왔다. 배가 슬슬 아파오려던 중 사진 속 야구공이 위풍당당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건네온다.


"무등 경기장에 자주 다니던 타이거즈 꼬마가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됐네?"


"타이거즈 야구도, 인생도 내 뜻대로만 되지 않네."


"뜻대로 되는 삶이 어딨니? 인생은 가끔 심술궂은 오심을 부리기도 하지."


"어렵다. 어려워.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이 안 와."


"내 얘길 들어봐. 세상은 마냥 정의롭지만은 않아. 아직도 곳곳은 부조리와 모순이 꿈틀대며 자신들의 어둑한 세(㔟)를 과시하고 있어. 그럼에도 우린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살 수밖에 없지. 비단 응당의 대가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정의와 진리 자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신념이자, 삶을 건전하게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기 때문이야. 가끔 인생이 우리에게 오심 판정을 내릴 때도 있지만, 오심 그 자체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당장의 삶만 흔들리고 훼손될 뿐이야. 인생은 예측불가능함 투성이라 모든 게 계획대로만 흘러가진 않지. 오심도 삶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담대함이 필요해. 한 번 내린 판정은 뒤바뀔 수 없어. 바꿀 수 없다면 과감히 수용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돼. 오심은 어느 때나 튀어나올 수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오심보단 정심의 수레바퀴로 굴러가는 세상이니까 너무 연연하지 마.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든, 전혀 괘념치 않고 인생의 완벽한 홈런을 날릴 수 있도록 기대할게. 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오심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과 오심을 기회로 바꾸는 혁신이 너의 시그니처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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