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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사물이 건네는 따뜻한 이야기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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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현기 Nov 28. 2024

절뚝이는 건 내 다리가 아닌 나의 의지

밑창이 닳아진 신발이 건네는 몇 마디

황소개구리를 잡겠다며 동네 저수지와 웅덩이 등지로 겁 없이 출정을 나갔던 미취학 아동 시절. 지방의 한 중소도시에 기지를 마련한 철부지 패거리들은 동네 곳곳을 활보하며 그날그날의 놀이를 궁리하곤 했다. 하루는 자기주장이 강한 코보(공기 마시듯 코를 자주 들이마셨던 친구)녀석이 어린 마초들에게 어울리는 아이디어 하나를 냈다.

"킁킁.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 어때? 훌쩍. 무서운 사람은 빠져."

"좋아. 우리 구슬 걸고 하자."

"이긴 사람한테 전부 몰아주기."

"코 좀 그만 마셔."

놀이가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순간 마초에서 겁쟁이로 신분이 추락할 것이란 걸 모두들 본능적으로 직감했는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호응의 목소리에 동의의 의미를 담았다. 나도 선뜻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면서 대회 장소까지 제공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마침 우리 집 옥상에는 환기구 역할을 하는 2미터 높이 가량의 구조물이 하나 있었고, 철제테두리를 두른 평상이 구조물에서 횡으로1미터 쯤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평상시에도 그 높은 곳에서 자주 뛰어내린다는 허풍을 지껄이며(사실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했다) 선수들을 옥상으로 인도했다. 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 위에 허세라는 누름돌을 간신히 올려놓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심장 떨림을 위장했다.

이름하여 '구조물 난간에서 뛰어내려 평상 한가운데에 착지하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양궁처럼 평상의 정중앙에 가장 근접하게 안착한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놀이. 우승자에게는 모두에게 조금씩 걷어 놓은 유리구슬을 독차지할 수 있는 특권이 걸린, 동심들에겐 블록버스터급 규모의 대회였다.

홈그라운드 이기도 하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다 싶어 나는 호기롭게 1번 선수로 나섰다. 막상 구조물에 올라가 보니 높이도 높이지만 평상까지도 거리가 꽤 있어 보였다. 내기를 물리고 싶었지만 비웃음을 사기는 싫었다. 결국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 뒤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내렸다. 잠시나마 공중에 떠 있던 찰나의 순간, 지난 칠 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을 떠올렸다. 평상 중앙까지 닿기엔 도약 거리가 턱없이 짧았다. 이대로라면 평상이 아닌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결국 내 오른쪽 정강이는 평상의 철제테두리로 향했고 뽀각,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졌다. 단말마의 고통을 내지르며 그대로 옥상 바닥에 나자빠졌다. 어린 마초들은 내 비명 소리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내 어머니를 데리러 옥상 아래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워크에식(work ethic)을 발휘했다. 아들 친구들에게 먹일 카스텔라를 만들고 계시던 어머니는 허겁지겁 옥상으로 올라와 일곱 살짜리 아들을 등에 업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동네 의원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친 아들을 등에 업고 달리는 어머니는 원더우먼 그 자체였다.

그날의 사고로 몇 주간 무거운 깁스 생활을 해야 했다. 석고 소재의 깁스라 무거운 건 둘째치더라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꼬랑내 고문은 당장 사상전환을 하겠다며 각서를 쓰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중량과 후각과의 처절한 사투 이후, 드디어 깁스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깁스 이후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는지 주변 사람들이 왜 자꾸 다리를 저냐며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다. 당시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리를 절었던 원인은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한 번 부러졌던 다리였기에 조심조심 의식해서 걷다 보니 걸음을 걷는 본새가 이상해졌다거나, 혹은 애초에 돌팔이 의사가 뼈를 잘못 붙였다거나.

원인이야 뭐가 됐든 그때 이후 내 신발은 유독 오른쪽 다리의 발날 밑창 부분이 먼저 닳기 시작했다. 새 신발을 살 때마다 늘 오른쪽 다리 발날 부근 밑창 부분부터 닳았고 균형이 무너진 신발은 나를 후천적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군대 시절에는 사단장급 표창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가다가 사단장님이 저 자식 걸음걸이가 왜 저러냐며, 군인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냐며 그 자리에서 표창을 취소할 뻔한 일화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걸음걸이는 점차 절름발이로 고착화되어 갔다.

언제까지고 절름발이로 살 순 없었다. 신발을 새로 살 때마다 의식적으로 오른쪽 다리 엄지발가락에 힘을 빡 주고 안쪽으로 내딛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초반에 반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의 걸음걸이로 되돌아가 다시 오른쪽 다리 발날 쪽부터 신발 밑창이 닳기 시작했다. 어른이 된 지금, 예전보단 훨씬 나아진 걸음걸이로 지면을 딛고 있지만, 절름발이 습관이 완벽하게 고쳐지진 않은 듯하다. 밑창 닳는 속도만 조금 늦추어졌을 뿐 오른쪽 다리 발날 쪽 밑창이 닳는 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기존 신발이 낡아서 새 신발을 사는 게 아니라 신발 밑창 한쪽이 닳아서 새 신발을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을 갖춰 입고 구두를 꺼내 신기 위해 신발장을 열었는데 오랜 시간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낡은 운동화가 서운한 듯 말을 건네온다.

"어이, 절름발이 친구. 날 완전히 잊은 거야? 그날그날 패션에 맞춰 한 번쯤은 꺼내서 신어줄 수도 있었잖아. 서운하게 새 신발만 신기야?"

"그동안 지독한 발냄새를 참아가며 애써준 건 고마워. 미안한 얘기지만 넌 이제 신발 밑창이 기형적으로 닳아 있잖아. 널 신었다가 다시 절름발이가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내 밑창을 닳게 한 게 누구였드라?"

"내 잘못이지. 그 점은 미안하게 됐수다."

"도대체 널 거쳐갔다가 폐기된 신발이 몇 켤레야?"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적은 숫잔 아니겠지."

"내 얘길 들어봐. 습관이란 건 쉽게 바꿀 수 없기에 잘못된 습관을 정상의 영역으로 돌려놓기 위해선 의식적인 노력이 꾸준히 동반되어야 해. 계속 절름발이로 살지, 남들처럼 평범한 걸음걸이로 되돌아 올지는 확고한 의지와 실천에 달려 있지. 네 입장에선 노력을 해왔다고 자부하겠지만 잘 생각해 봐. 일곱 살 때부터 대략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발날 쪽 신발 밑창이 닳는다는 이유로 새 신발을 사고 있잖아. 서운하게 들릴지 몰라도 결국 정상화 및 변화를 위한 네 노력은 극히 미미했다는 거야. 하다 못해 교정용 깔창을 구매했다던지, 발날 쪽 깔창에 신문지라도 뭉쳐서 넣어놨더라면 진작에 절름발이를 탈출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 그저 걸음걸이만 신경쓰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대처가 널 절뚝이로 만든 거야. 자신을 절뚝이게 하는 요인을 자각했다면 어떻게든 되겠다는 생각으로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선해 보겠다는 결단과 그에 걸맞는 노력이 필요해. 물론 최선의 노력이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을 만들 수는 있거든. 진짜 절뚝거리는 건 네 다리가 아니라 너의 의지임을 명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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