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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지울수록 더러워지는 칠판지우개

4

by 이현기

4. 거울 속에 비치는 건 형체가 아닌 마음일 수 있다.


소스라치는 경험을 했다.

똑같은 거울 앞에 섰음에도

어느 날은 밉상이고

어떤 날은 호감상으로 비치는 얼굴.

그날그날의 조명과 기분 탓일까.

거울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쌓일수록

실은 거울에 비치는 형상이

사실 내 얼굴이 아닌

내 마음의 민낯은 아닐까 하는

아르키메데스적 상념이 찾아왔다.


마음이 어둠으로 차 있는 날은

얼굴엔 침침한 못생김이 그득하고

마음에 빛줄기가 찾아든 날은

내 이목구비는 화사하고 훤칠하게 변모한 건 아닐까.


내 가슴 안에 담긴 마음이란

형이상학적 차원의 실재일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고 해서

그동안 마음속에 병균을 키워온 나 자신이

저주스러울 만큼 원망스러웠다.

하얀 백지로 태어난 순수한 마음을

잔인하게 난도질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전횡이었다.

이리저리 찢어진 상념의 조각들이

어지럽게 들쑤셔놓은 내 마음은

얼마나 많은 단말마의 고통을 질러댔을까.


'나도 아픔이란 걸 느껴. 너의 관념과 감정들은 독이 묻었어.'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내가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이

내 마음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인간에게 오감이라는 것이 있듯이

마음에도 감각이 있어 통증을 느낀다.

마음이 통각을 느낄수록

나의 삶 역시 절규로 가득 찼다.


4-1. 지울수록 더러워지는 지우개


나는 폭력 교사다.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학생들을 보면 참을 수 없는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수업 시작을 알리던 종소리는 공기 중에 소멸되어 진작에 자취를 잃었다. 교사가 버젓이 교실에 들어와 있음에도 칠판엔 전 시간에 써놓은 듯한 수학공식이 지워지지 않은 낙서마냥 남아 있었고, 학생들은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 죄다 책상 위에 기절해 있었다. 학생들을 복날에 개 잡듯 패던 1990년대 교사독재시절을 예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교사와 학생 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과 윤리 의식이라는 게 있다. 나는 이런 무기력한 벽지로 리모델링한 교실에 들어설 때면 피가 거꾸로 솟아오른다.


"야, 이 Baby(ㅅㄲ)들아! 안 일어나? 주번 Baby(ㅅㄲ), 앞으로 튀어나와!"


미친개의 급작스러운 호통에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학생들이 저마다 움찔거리며 저주에서 풀려났고 주번 Baby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갈지(之) 자 스텝을 밟으며 앞으로 기어 나왔다. 한두 번도 아니고 도저히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 기회에 교권의 지엄함을 보여줘야 한다. 학생인권례는 오늘부로 학생인권례가 되어 막을 내릴 것이다. 인상적인 쇼케이스가 될 것이다.


"엎드려뻗쳐!!! Baby야."


주번 Baby는 그제야 자신에게 닥칠 뼈아픈 미래를 알아차린 듯 교실 한 구석에 조용히 엎드려뻗쳤다. 그사이 나는 청소 도구함에서 짱짱해 보이는 청소용 빗자루를 한 대 꺼내와 단단하게 그러쥐었다. 폭력을 휘두르기 좋은 그립감이다. 빗자루를 뒤집어 잡고 손아귀에 한껏 에네르기아를 모은 후 내면에 쌓여 있던 쓰레기 같은 감정을 주번 Baby의 엉덩이를 향해 몽땅 쏟아부었다.


'퍽, 퍽, 퍽.'


"주번 활동 똑바로 안 해?"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목소리가 그것밖에 안 나와? 모기야? 앵앵거리게."

"잘! 못! 했! 습! 니! 다!"


.

.

.

.

안타깝지만(?) 지금까지의 장면은 나만의 슬픈 백일몽이었다. 나는 실은 비폭력 교사다. 도덕성과 사회성이 결여된 학생들을 보면 비집고 나오려는 분노를 충분히 잠재울 수 있다. 실제 현실은 아래와 같다.


"칠판이 더럽네? 주번 누구냐? 나와서 닦아라."

"샘, 주번 자요. 샘이 앞에 계시니까 샘이 지우세요."

"주번은 주무시는구나. 그래, 가까이에 있는 샘이 지울게."


내가 학창 시절 때만 하더라도 자기감정대로 몸이 반응하며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둘렀던 선생님들도 몇 분 계셨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교사는 학생들이 던지는 감정의 공을 일일이 받아내야 하는 포수 글러브 신세다. 학생들이 던지는 패대기볼도, 각이 큰 변화구도, 때론 가슴 아프게 날아오는 묵직한 돌직구도 묵묵히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내 여리디 여린 마음은 퉁퉁 부어올랐다. 지루한 수학 수업을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하는 인류애적 합리화를 이성에 욱여넣고 칠판지우개로 손수 칠판을 지워나갔다. 그런데 지우면 지울수록 칠판은 하얀 분칠을 더해가며 더욱 더러워졌다. 그래, 자느라고 칠판지우개를 안 빨아놨을 수도 있지. 괜찮아. 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후 비관의 언어를 삼키고 달관의 말을 내뱉었다.


"오호, 지우면 지울수록 더러워지네. 역설적인 지우개구만."

"오, 샘. 그게 역설법이었어요? 왠지 이해가 더 잘 돼요. 스타강사 같아요."

"스타강사 같다? 그건 직유법."

"우와! 샘은 우리 학교의 최태성(한국사 스타강사)."

"A의 B? 그건 은유법."

"우어어어! 명강사."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까 눈 깜빡할 새 문학의 주요 수사법을 세 개나 설명해 버렸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생동감 있는 현장수업인 것인가... 부득이하게 못된 마녀의 저주에 걸려 깊은 잠에 빠지는 통에 판서를 안 지워놓는 아이들이지만, 교과서 지문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수사법을 끌어와 설명하니 수업 분위기도 살고 학생들의 가늘었던 동공 지름도 조금은 커진 느낌이다. 그래,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들이다. 내가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섣불리 화부터 냈더라면 내 마음은 거무죽죽한 얼룩으로 도배되어 불결한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을까. 분노란 건 내 감정과 시간, 나아가 하루마저 잡아먹는 못된 녀석이다.


세계가 마련한 놀라운 균형 감각일지는 몰라도 모든 아이들이 불성실하지는 않다. 일손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굳이 지목하지 않아도 꼭 먼저 나서는 성실한 학생이 반에 서넛 쯤은 있다. 결국 주번이 아닌, 도덕적인 성향이 강한 학생 한 명이 나서서 자기가 빨아 오겠다며 분필 지우개를 들고나갔다. 새로 빨아온 지우개로 칠판을 지우니 닦인 부분에 내 모습이 비칠 만큼 칠판은 맑고 투명한 1급수가 되었다. 책상도 깨끗해야 공부할 맛이 나듯이 칠판이 깨끗하니 허기진 위장의 식욕처럼 수업할 맛도 맛있게 돋아났다.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칠판 한 구석에 정갈하게 놓여 있는 칠판지우개가 날 향해 살뜰하게 말을 건네온다.


"어이, 교사 양반. 학생인권시대이자 교권추락시대에 고생이 많아. 예전 같았으면 그 주번 학생은 바로 빠따(방망이) 감이었는데 말이지."


"시대가 많이 변했지. 해가 갈수록 학교 생활이 힘들어지네. 이거 원, 더러운 꼴 안 보려면 선생질을 그만두던가 해야겠어."


"교사 때려치우면 딱히 밥벌이는 있고? 칠판지우개 공장이라도 들어가게?"


"전생에 새끼줄이었어? 그런 식으로 비비꼬지 마. 단순히 푸념한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쓰나. 센스 없게."


"센스고 나발이고 네 마음의 얼룩은 닦아내고 있니?"


"마음의 얼룩이라니? 무슨 말이야?"


"내 얘길 들어봐. 내가 더러우니까 아무리 칠판을 닦아도 더 더러워질 뿐, 수업할 맛도 안 나고 짜증만 났지? 나도 자주 빨아줘야 칠판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듯이 우리의 내면도 자주 닦아줘야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라고. 네 지난날을 곰곰이 떠올려봐. 짜증, 분노, 우울, 시기 등의 감정에 마음을 뺏긴 채 살았는지, 아니면 평안, 기쁨, 행복 등의 감정에 안정감을 누리며 살았는지 말이야. 네가 품고 있는 악감정들은 은연중에 타인에게도 전파되어 그의 내면도 더럽히게 마련이야. 마치 더러운 칠판지우개로 칠판을 닦는 상황처럼 말이지. 반면 긍정적인 마인드로 남과 교감해 왔다면 선하고 포근한 감정은 타인에게도 전이되어 상대방의 내면을 깨끗하고 건강한 상태로 만들어줬을 테지. 내겐 이런 류의 메타포가 담겨 있는 거라고. 기억해. 감정에는 악함과 선함이라는 양극적인 면모가 팽팽하게 기싸움을 하고 있어. 감정이란 건 전염력이 강해 어떤 감정을 타인에게 자주 표출하냐에 따라서 너의 정체성이 굳어지는 거야. 너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로 기능하는 지우개야? 상대방의 얼룩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지우개? 아니면 상대방의 마음을 얼룩지게 하는 지우개? 이처럼 지우개로써 기능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테야. 하지만 난 믿어. 너는 네 마음에 남아 있는 얼룩부터 지워나가며 장차 타인의 상처를 지워주는 담박한 지우개가 될 것임을. 그러기 위해선 너부터 깨끗한 지우개가 되어야 해. 잘 할 수 있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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