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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Nov 07. 2024

마술이 마법이 되는 순간

카드가 건네는 몇 마디

 지금의 아내는 가랑비가 수줍게 흩날리토요일 오전, 소개팅 자리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내 인생 첫 소개팅이었다. 처음 만나는 낯선 여에게 어떤 말과 무슨 행동해야 할지 전혀 감이 없었던 연애의 젬병은 연애백서를 벼락치기하는 대신 취미 삼아 배우고 있마술을 준비하기로 맘먹었. 유치하게 마술이라니. 때만 해도 나에겐 어렴풋한 순수함이 묻어 있었나 보. 지금은 아내의 선명한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지만. 므훗.


 애용하는 유료 마술 사이트에 접속해여성의 환심을 살 만한 마술을 훑어보던 중 카드 마술 하나가 레이더망에 걸렸다. 그래, 바로 이거야. 궁상맞은 눈물을 머금고 유료 결제를 하니 마술 비법 영상을 클릭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기대감으로 뭉친 반죽을 발효시키니 희색이 만면한 설렘이 부풀어 오른다.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화질이 별로인 영상 우중충하게 생긴 남성 마술사가 어두침침한 색감의 정장을 갖춰 입고, 인위적으로 만든 세트장에서 미모의 여성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느끼함을 잔뜩 묻혀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마술사는 미모의 여성분에게 세상 재미없는 언어 무미건조한 화법으로 마술을 시연했다. 화들놀라는 척하는 여성 연기자, 아니 여성분의 표정은 미리 명령값이 입력된 기계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뭐 마술 비법 영상이라기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았다. 다큐 제목은 '자연스러움을 거부하는 사람들'.


 마술 시연 장면이 끝난 후, 제작진에서 미리 섭외해서 교육시킨 미모의 여성 연기자, 아니 마술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붙잡아 온 여성분(이라고 믿고 싶지만) 아쉽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중충한 남성 마술사가 다시 세트에 등장해 세상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어눌한 말투로 마술 트릭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마치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  발들어가 내 돈을 내고 욕을 먹어가며 밥을 먹는 듯한 느낌이 얼핏 들었지만, 그날 밤 마술사가 알려준 대로 치밀하게 트릭을 제작하고 손에 익을 때까지 연습을 반복했다. 사실 유료 영상 속 마술사가 여성분에게 날렸던 멘트들이 있긴 했는데 그건 너무 낯간지러워서 이성의 탈을 쓰고 도저히 따라 할 자신이 없었다. 그 멘트 그대로 따라 했다간 자칫 치한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술 도중 어설픈 실수라도 했다간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질 것이 했기에 오랜 시간을 들여 절실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연습을 반복하니 점차 마술이 자연스러워졌고. 세잎 클로버 밭에서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다음날 소개팅에서 써먹을 세련되고 유머스러운 멘트들도 하나씩 싹을 틔웠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단지 몇 분의 마술을 위해 밤을 꼬박 지새웠다. 당시 내 나이가 이십 대의 끝자락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하라 하절대 못한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주제가 '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보잘것없는 남자의 카드 마술 비법'은 아니니 거두절미하여 마술의 구체적인 방법 및 과정까진 밝히 않겠다. 그래도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상대방이 뽑은 카드의 앞면 그림이 순식간에(트릭으로) 지워지고 그림이 사라진 여백엔 네임펜으로 방금 쓴 듯한 손글씨가 짜잔, 하고 나타나 마술이랄까. 흐릿한 기억이지만 당시 썼던 손글씨를 떠올려 보면,


'저 같은 미남을 가까이서 영접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사귀고 싶죠?'


 물론 장난이다. 갑자기 개구쟁이 무의식이 개입하는 바람에... 일단 장난기 많은 무의식 녀석을 다시 내면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고 진지하게 당시 기억을 환기해 보면 아마 이런 류의 멘트를 적었을 것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시네요.'


 마술 시연 당시의 장면을 지금도 그려보라면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마술 전과 비교하여 지름 둘레가 1.5배 정도 커진 소개팅녀(전 여자 친구, 현 아내)그로테스크한 동공과 콧구멍, 마술을 성공해 한층 우쭐해진 나의 어깨와 거만이 섞인 눈매. 우리는 소개팅 이후 몇 달 뒤 정식 교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별과 재결합의 숨 막히는 술래잡기 끝에 마침내 5년 뒤, 축복의 가랑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전에 혼인 서약을 주고받았다. 신혼 시절, 아내는 정장 셔츠를 정성껏 다리면서 소개팅 당시 상황에 대해 간증을 한 적이 다. 마술의 신기함을 떠나서 소개팅이란 자리에 무턱대고 나오지 않고 뭔가를 성심껏 준비해 어리숙한 남성의 정성에 감동했다고 말이다. 난 그동안 아내가 나한테 반했던 조건이 젠틀한 첫인상, 혹은 수려한 외모일 줄 알았는데. 막장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을 알아차린 주인공의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몇 년 전이던가. 학교 일과 시간 중 선생님들 눈을 피해 트럼프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적발하여 카드를 압수한 적이 있었다. 졸업할 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녀석들은 나와의 사소한 약속 따위는 가볍게 잊어버리고 졸업식이 끝난 후 부리나케 꽁무니를 뺐다. 결국 그 카드는 내 서랍 깊숙한 곳에서 꽤 오랜 시간 무심한 주인을 기다리며 기약 없이 갇혀 있었다. 근래리프레쉬도 할 겸 서랍 정리를 하다가 몇 년 전 주인에게 버림 당한 트럼프 카드를 우연찮게 발견했다.


 실로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쐰 카드는 케케묵은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고 말을 건네온.


"흠흠, 이게 몇 년만이야. 오랜 기억 속의 카드 마술 마스터."


"에이, 솔직히 마스터까진 아니었지."


"너 자존감이 여전히 낮구나? 마술로 지금의 아내를 얻었으니 로또 맞은 거잖아?"


"그건 인정. 하지만 마술을 잘했다기보다 나의 지극한 정성에 아내가 감동한 거지."


"지극한 정성이란 말, 듣기 나쁘지 않은 걸? 맞아.  말은 단순히 마술 스킬을 말하는 게 아니었어. 넌 당시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을 부렸지. 마술이 아닌 마법 말이야."


"네 말이 맞아. 아내를 만난 건 내 삶에 찾아온 기적이자 마법이었어."


"이제부터  얘길 잘 들어 봐. 마술을 펼칠 때 눈을 동그랗게 모으고 신기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을 뱁새처럼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있어. 마술을 신기해하는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기적을 믿는 유형이지. 하지만 어떻게든 마술의 속임수를 끝까지 캐내려 하는 사람은 기적보단 불가능을 전제로 한 객관적인 현상에 의존하는 유형이야. 현실은 현실일 뿐이라며 기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감히 꿈꾸지 못하는 거지.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기적보다 현실에 복종한 채 살고 있어. 참 안타까워. 예전의 네가 그랬듯 진정성과 간절함이 있으면 운명처럼 기적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말이지. 이젠 마음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는 기적을 꺼낼 차례야. 인생은 절실한 자에게 때론 마법을 부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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